목록수필 (28)
우리도 씁니다
♬음악: Nils Frahm - My Friend the Forest “질문. 다른 나라로 간다면 어디서 살고 싶나요?” 그녀가 물었다. “음, 독일?”, “헐, 내가 가고 싶었던 곳이었는데.” 그녀는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1년 정도 교환학생으로 독일에 갈 생각이었다고 고백했다. 독일? 왜? 그녀는 이유를 설명했다. 독일에는 유수한 제약회사가 많다고.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가 말하길, 만약 그녀가 독일이 마음에 든다면 독일 대학에 편입하고 그곳에 살아도 된다고 말했다고. 그때 나는 아찔함을 느꼈다. 순전히 우연이었다. 우리가 만난 것 말이다. 그 사실이 아찔했다. 그녀가 독일로 갔다면? 우리는 영원히 모르는 사이가 되었겠지. 통화가 끝나고 조건(if)이 많은 알고리즘들이 머릿속을 채웠다. 그리고 우리 사이를..
어렸을 때 내가 쓰던 물건들은 대부분 누군가가 쓰던 물건들이었다. 형이 입었던 바지, 옆집 형이 탔던 자전거, 아래층 누나가 가지고 놀았던 소꿉놀이 세트를 조금 늦게 태어났다는 이유로 내가 물려받았다. 그래서 나는 가끔 ‘내가 제일 먼저 태어났더라면…’하고 생각했다. 내가 제일 먼저 태어났으면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물건들을 오직 나만을 위해서 사야했을 테니까. 항상 남이 사용하던 물건을 썼기 때문에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새 물건을 동경했다. TV 광고에 나온 장난감은 완벽해 보였다. 글라스데코는 한 번도 짜지 않아 꽉 차 있었고 소꿉놀이 세트는 빳빳한 박스 안에 들어가 있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저런 완벽한 물건을 어떻게 사용했길래 옆집 형과 아래층 누나는 물건에 때를 입혔을까. 나라면 그러지 않을 것..
1. 이름도 모르는 타인을 눈에 담는다. 사람들은 그것을 ‘훔쳐본다’고 한다. 우리는 지하철에서, 학교에서, 일터에서 저 남자가 보는 영상, 저 여자가 든 핸드백, 그들의 반지, 시계, 그들이 읽는 책, 그들이 가진 핏줄과 머리카락을 훔쳐본다. 그리고 그 조각을 모아 상상의 인물을 만든다. 사람의 껍데기를 몰래 보는 것은 폭력일 수도 있다. 하지만, 껍데기로 채울 수 없는 빈 공간에 상상을 채워 넣는 건 흥미롭다. 재밌는 점은 상상이 어설픈 앎으로 변하고, 종종 어설픈 앎은 우리를 사랑에 빠지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어설프게 알기 때문에 지원하고 싶은 학과가 사랑스럽고, 어설프게 알기 때문에 연예인에게 빠지는 것처럼. 2. 완벽한 대칭인 공작나비, 한 쪽 눈이 없는 네페르티티의 흉상. 자, 우리는 어..
박은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무심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유머러스하다. 그래서 과에서 인기가 많았다. 그런데 바로 그 무심한 성격 때문에자신을 향한 호감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호감을 표현하지도 못했다. 나와 전은 옆에서 답답해하며 이런 저런 조언을 해주기도 했지만 박은 알아들은 체 하고는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번도 연애를 해보지 못 한 채로 두 학년을 다니고 박은 군대를 가버렸다. 그 뒤를 따라서 전과 내가 순서대로 입대했다. 2010년 2월 내가 셋 중에 마지막으로 제대하고 캠퍼스를 찾았을 때, 박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전의 설명에 따르면 박은 제대하고 스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그녀를 만났다. 둘은 리프트 아래에서 리프트 이용권을 검사했다. 10시간 가까이 서..
平和. 한국에서는 평화라고 읽고 일본에서는 헤이와라고 읽는다. 平和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한국인은 휴전선이나 식민지 조선을 생각한다. 平和를 위해 통일을 하거나 북한의 핵무기와 탄도미사일을 없애야 한다. 일본과는 과거사를 청산하고 다시는 제국주의의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반면 일본인은 수만 명의 민간인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히로시마를 생각한다. 그리고 다시 히로시마의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핵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한국인은 일본이 히로시마에서 평화를 생각하는 것을 보고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로서 2차 세계대전과 식민지를 바라볼까봐 걱정한다. 권력의 부당한 사용에 의한 인권의 침해가 없는 상황이라고 平和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平和를 실현할지 생각하는 순간 알게 ..
“너 일본 좋아해?” 생활실에서 일본어를 공부하고 있으면 선임들은 나에게 자주 이 질문을 했다. 한 국가 안에 있는 정치, 사회, 문화, 역사, 과학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하나로뭉쳐서 좋고 싫음을 가릴 수 있을까. “어떤 건 좋고 어떤 건 싫습니다.” 선임은 영어를 공부하는 후임에게는 다른 질문을 했다. “너 영어 잘해?” 2018년 월드컵 때 후임 한 명이 물었다. “김도겸 님은 한국이랑 일본 경기에서 어디 응원하십니까?” “잘 모르겠네.” 이런 질문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친구에게 하니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너는 그런 말 들으면 화 안 나?” 별로 안 났다. 한국과 일본의 축구 경기를 다룬 기사에서는 다른 나라와의 경기를 다룬 기사와 다르게 숙적, 투혼 등의 전쟁을 연상시키는 단어가 자주 사용된다. ..
♬ 음악: On the Nature of Daylight 그림 하나를 상상하곤 한다. 해변에 큰 배가 정박해 있고 중년 둘과 어린 짐승 셋이 있는 그림. 그 그림을 보니 갑자기 진짜 이야기를 하고 싶다. 물론 난 그 시절을 모른다. 귀로 들은 이야기와 상상이 뒤섞여있다. 형이 있었다고 들었다. 열네살 위의 형. 나는 열네 걸음 앞선 남자를 보며 내 삶의 리허설을 볼 뻔했다. 하지만 그는 일찍 죽었다. 형은 나와 같은 부모의 세포에서 이 세상으로 밀려왔다가 다시 여백이 된 것이다. 파도처럼. 아버지와 친할머니는 못가겠다는 어머니를 두고 산에 올라갔다. 그리고 어린 겨드랑이에 꽂았던 손으로 어린 뼛가루와 익은 술 냄새를 뿌렸다. 모유색의 뼛가루는 분필가루가 되어 추억을 그렸을까? 산의 나무들은 나의 부모가 ..
어렸던 어느 날, 뉴스에서 우리나라 인구가 5천만이라는 말을 흘러나왔다. 틀렸다. 사회시간에 분명 4천8백만이라고 했다. 아빠에게 물었다. 금방 2백만이 늘어난 것이냐고. 아빠는 ‘둘다 5천만이야.’라고 대답했다. 그 말투는 퉁명스럽거나, 냉소적이진 않았고 따뜻한 뉘앙스에 가까웠지만, 의문이 해결될 정도의 정보를 담고있지는 않았다. 4천 8백만이 어떻게 5천과 같지. 어른들의 숫자에선 2백만 정도는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것인가. 작은 수는 아무 의미 없는 것인가. 그 당시에는 다른 감정이 없는 ‘궁금함’뿐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영화를 보다 낯선 단어에 귀가 닿았다. 타짜2에서 주인공 대길이가 일명 ‘탄’을 맞는 장면이었다. 대길이는 판에서 진 댓가로 9억9천8백40만원을 물게 되었다. 귀를 끈 단어는 ..
혹시나 싶어서 준비해 간 휴지를 다 쓰고 마지막 남은 휴지를 다섯 번이나 접었다. 휴지를 더 많이 챙겨올걸. 휴지를 여섯 번째 접으니 콧물이 새어 나왔다. 너에게 마지막으로 ‘사랑해’를 던졌고 너는 내가 던진 ‘사랑해’를 맞고 꿀럭였다. 방에 돌아와서 사진을 지웠다. 편지를 꾸기고 선물을 꺼내고 반지를 버렸다. 쓰레기봉투가 아직 절반은 남아 있었지만 묶어서 내다 버렸다. 방 안이 쌀쌀했고 발이 시려웠다. 의자를 젖혀 천장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다 속에서 두 번이나 걸렸다. 그동안 너무 많이 ‘사랑해’를 찍어낸 탓인지 ‘사랑해’는 너를 감동시킬 수 없었다. 다 쓰지도 못하고 남아버렸다. 그렇지만 물건은 버려도 ‘사랑해’는 버릴 수가 없었다. 혹시 모르니까 그동안 ‘사랑해’를 은행에 맡겨 ..
와인을 너무 많이 넣었나 보다. 머리가 띵하고 세상이 돈다. 그릇을 물에 담가 두고 소파 위로 떨어진다. 30평 집 안에서 고요가 팽창한다. 기분 좋은 고요의 무게에 눌려 소파 깊숙이 파묻힌다. 눈을 뜨니 엄마가 현관문 앞에 서 있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면서 나를 발견했나 보다. 고개를 젖혀서 주황색 햇빛에 익은 눈으로 이마 뒤를 살핀다. 해가 지고 있다. 해는 아파트에 가려졌지만 여전히 벌떡이고 있었다. 나는 벌떡이는 해의 박동을 느낄 수 있었다. 꿈틀거리는 해와 꿈틀거리는 조직의 횡단면. 소의 간이 반으로 갈라졌다. 갈라진 조직은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는 것 같다. 송골송골 맺힌 피가 점점 커지다가 뭉쳐지고 이내 주륵 흐른다. 선홍빛 단면 위로 피가 줄기를 이루며 흘러내린다. 울퉁불퉁한 연회색 시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