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단편소설 (7)
우리도 씁니다
“내가 맛집 데려가 줄게!” 하연이 나를 당당히 데려간 곳은 맥도날드였다. “보통은 맥도날드를 맛집이라고 하지는 않아.” “맥도날드 맛있지 않아? 상하이 버거를 이길 수 있는 버거는 없지.” 하연이 싱긋 웃었다. 하연은 입을 조금 움직이거나 눈을 조금 감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편하게 하는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쉽게 웃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잘 웃었다. 날이 추워질 무렵 대학교 동아리에서 그녀를 만났다. 처음 만난 날에 하연은 검정색 가디건을 입고 있었다. 하연은 눈에서 태어난 것처럼 피부가 하얬다. 검정색 가디건은 그녀의 하얀 얼굴을 더 하얗게 만들었다. 따뜻한 카페에 들어가면 금방 얼굴이 발갛게 익었다. 검정색 커피가 빨대를 따라 작은 이빨을 넘어 하연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 “콜라 별로 안 ..
그녀가 허리를 숙였을 때 마스크 틈으로 그녀의 코와 입술이 보였다. 넋 놓고 보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 서둘러 눈을 돌린다. 눈동자가 한 바퀴를 돌아 그녀에게 향했을 때,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들켰다.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당연히 도망쳤지. 훔쳐보다 걸리면 종신형인 거 몰라?” 당황해서 눈이 마주친 채로 1초 동안 그대로 있었다. 아주 위험하고 바보같은 짓이었다. 내가 훔쳐봤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었다. 머리 위에서 종소리가 울리고 문이 열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문 밖으로 뛰었다. 내가 내려야 할 역까지는 아직 더 가야 하지만 아무래도 좋다. 나는 범죄 현장을 벗어났다. 시퍼런 피가 묻은 손을 닦아야 하지만 적어도 현행범 체포는 면했다. 그런데 이런 중대한 범죄를 ..
친구가 1년 동안 사귄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말한다. “나 수진이를 좋아하지 않았던 거 같아.” “거짓말. 너 걔랑 처음 사귈 때 입이 귀에 걸려 있었어.” “그거 연기한 거야.” “지랄.” “적어도 나는 기억이 안 나. 사랑은 영원할 수 없나 봐. 처음에는 너가 말한 것처럼 정말 좋았을 수도 있어. 그런데 그게 깎이고 깎여서 결국에는 기억조차 안나.” 친구는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에서 조엘은 사랑했던 연인 클레멘타인의 기억을 지운다. 하지만 기억은 지워도 클레멘타인과 함께 했던 감정은 지울 수 없었다. 아니면 기억을 지우는 장치가 무의식까지 간섭하지는 못했거나. 어쨌든 조엘은 결국 클레멘타인을 잊지 못하고 다시 사랑을 고백한다. 친구의 기억은 조엘과 다른 순서로 지워졌다. 조엘의 기억은 가장 좋지 ..
아직 추운 날이었다. 지나가는 대학생들의 대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어색한 밤이었다. 젖은 바닥을 긁으며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도 들렸다. 준비한 말이 나오려다 목에 걸려 대롱대롱 흔들렸다. 다음에 말할까? 아니다. 오늘은 말해야 한다. 저기 걸어오는 학생들이 지나가고 나면 이야기해야지. 저기 보이는 버스정류장을 지나면 이야기해야지. 해야지, 해야지. 쑤욱. 내 팔 속으로 너의 팔이 들어왔다. 풍선에 바람이 빠지듯 나의 말이 나왔다. “우리 사귈래?” “그래.” 고개를 돌려 너를 보지는 못했지만 너는 소리 없이 웃었다. “오늘 그 말을 하려고 했어?” 너가 물었다. “아니. 다른 말을 하려고 했어.” “무슨 말을 하려고 했어?” 너가 다시 물었다. “나 너 좋아해.” 이번에는 고개를 돌려 너를 봤지만 너가 ..
박은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무심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유머러스하다. 그래서 과에서 인기가 많았다. 그런데 바로 그 무심한 성격 때문에자신을 향한 호감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호감을 표현하지도 못했다. 나와 전은 옆에서 답답해하며 이런 저런 조언을 해주기도 했지만 박은 알아들은 체 하고는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번도 연애를 해보지 못 한 채로 두 학년을 다니고 박은 군대를 가버렸다. 그 뒤를 따라서 전과 내가 순서대로 입대했다. 2010년 2월 내가 셋 중에 마지막으로 제대하고 캠퍼스를 찾았을 때, 박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전의 설명에 따르면 박은 제대하고 스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그녀를 만났다. 둘은 리프트 아래에서 리프트 이용권을 검사했다. 10시간 가까이 서..
“나도 왕년에는” 박은 숨을 후 내쉬고 말을 이었다. “비 좀 맞았어.” “비? 학점 말하는 거야?” 나는 무슨 말을 하냐는 표정으로 물었다. “야 너가 비만 많이 맞았냐? 씨도 많이 맞았지. 아주 흠씬 두들겨 맞았지.” 전이 술집의 시끌벅적한 소음에 한 몫 더하며 외쳤다. “아니! 레인 말하는 거잖아. 하늘에서 내리는 레인.” 박이 웃으며 말했다. “대학생 때는 비 맞는 거 좋아했거든. 아니 지금도 싫어하지는 않아. 오히려 맞고 싶어. 그런데 지금은 비를 맞으려면 작정을 해야 한단 말이지. 포마드스타일로 머리를 빗어 올리고 왁스를 바르면서, 가방에 512기가바이트 맥북 프로를 들고 다니면서, 천연가죽으로 만든 구두를 신으면서, 결정적으로 자동차를 타면서 비를 맞을 수 없게 되어 버렸어.” 대학 시절에 ..
내가 사는 안암에서 한양대학교까지 자전거를 탈 때 크게 세 가지의 길이 있다. 나는 그중에서 청계천을 따라가는 길을 가장 좋아한다. 나는 이 길을 청계천 하이웨이라고 부른다. 청계천 하이웨이는 자전거 전용도로다. 뒤에 있는 자동차가 클랙슨을 울릴까 봐 빨리 달릴 필요가 없다. 그리고 하이웨이답게 신호등이 없다. 한번 받은 신호를 계속 받으려고 조바심을 내지 않아도 된다. 초가을 아침 청계천 하이웨이는 모든 것의 경계가 뚜렷해진다. 듬성듬성 군락을 이룬 갈대는 검은색 테두리라도 있는 것처럼 그 뒤의 청계천과 구분된다. 청계천 하이웨이 위로 펼쳐진 고가도로 사이로 비치는 햇빛은 밝음과 어두움을 칼로 베어버린다. 고가도로가 구름 걷히듯 사라지면 학교에 거의 다 온 것이다. 이제 경계는 햇빛 속으로 사라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