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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씁니다
이우정 감독의 에는 세 여고생이 나온다. 그리고 작은 것에도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만들어지는 시기 속 이 이야기의 결말은 파국에 가깝다. 상영관을 나와 나름의 ‘한 줄 평’을 기록한 뒤 다른 평을 찾아보았고, 그중 하나가 눈에 띄었다. “나는 그 시절을 어떻게 통과했을까.” 나 역시 의문이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별것도 아닌 것들이 참 별것으로 느껴지던 시절이었는데, 난 어떻게 그 소용돌이를 통과했을까. 작년까지만 해도 라떼를 한 잔 마시며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부모, 경제적인 상황, 기회가 불평등한 환경 등이 그것들을 좌지우지한다고. 특히 학업에 있어서 머리가 좋고 나쁨은 문제가 아니며, 전부 기회와 의지의 문제라고. 그렇다면 결국 내가 그 격정의 시기를 큰 문제 없이 통과할 수 있었..
1. 시간이 없었다. 마지막 알람을 듣고 눈살을 찡그리며 10시 상영 영화는 취소했다. 밤만 되면 안 되던 것들이 가능해지는 환상의 늪에 빠진다. 신음, 그리고 한숨. 후회와 함께하는 또 다른 아침이었다. 후회는 고민으로 이어졌다. 10시 영화를 본다면 다음 영화까지 1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으니, 같은 영화를 근처 다른 극장에서 보고 넘어가면 전날 계획한 ‘완벽한 일정’을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고민 속에서 그렇게 20분을 또 누워있었다는 것이다. “오케이. 10시 반쯤 상영하는 곳으로 가면 된다.”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핸드폰 화면을 켰다. 10시 35분에 상영하는 곳을 발견했다. 예매, 10분이 또 지나있었다. 샤워한 뒤 바로 밥솥을 열었지만, 밥솥은 어제부터 식어있었다. 덕분에 땀이 나..
역사를 공부 중이다. 정확히는 한국사. 특정 시험의 합격이나 대단한 역사 이야기를 만들어 보겠다는 시도는 아니고,(물론 그런 부가적인 효과를 후에 기대할지도 모르겠지만,) 단지 그간의 내 행태를 돌아봤을 때 상식, 특히 역사에 대한 상식이 ‘독립운동가’와 ‘매국노’도 판별하지 못하는 가히 ‘매국노 수준’이라는 판단에서 시작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 등과 같은 역사 영화를 좀 더 재미있게 보고 싶어서인 것도 이유 중 하나이리라.(그런 점에서 이준익 감독의 영향이라 할 수도 있겠다.) 신유박해, 갑신정변, 을미사변 등 당시 사건을 4음절 단어들로 함축해놓은 것이 새삼 흥미롭게 다가오고,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박해’, ‘정변’과 같은 의미가 맞물리며 머릿속에서 휘발되는 속도가 줄어든다. 너무 당연한 설명..
1. 나는 사칙연산을 포함한 단순 계산을 시작으로, 고등학교 수학 과정을 거치며 어떤 공식이나 결과(수학적 정리)에 대한 증명을 마주하며 수학에 매력을 느껴왔다. 처음에는 그 과정 역시 시험이라는 틀 안에서 외워야 할 글과 수식의 나열에 불과했을지 몰라도, 이해하면서부터는 비슷한 모든 문제들이 도미노처럼 내 앞에서 굴복하듯 무너지기 시작하며 희열과 자신감을 생산해냈다. 그리고 고등학교 수학을 벗어난 수학의 ‘역사’와 그 사이에 생겨난 문제들을 마주했고 수학의 또 다른 방향을 알 수 있었다. 답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예를 들면 2차 방정식에는 ‘근의 공식’이 존재하지만, 5차 이상의 방정식에서는 근을 찾는 공식이 없고, 이는 증명된 사실이다. 또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그렇다. 굉장히 간단한 ..
‘300’, 다시 봐도 ‘300’이다. 이상하다. 분명 ‘500’이어야 맞다. 내가 지불한 것은 틀림없이 10000원이었고, 그중 5%라 하면 ‘500’이다. 그런데 ‘300’이 적혀있다. 시스템 오류이려나. 하지만 그간의 경험으로 봤을 때 의심해야 할 대상은 직감적으로 ‘나’였고, 어딘가에 숨어 있을 그 이유를 찾아보기로 했다. 나름 수년간의 노력이 담긴 ‘VIP 라운지’ 버튼을 눌렀다. 천천히 스크롤을 내리니 찾던 ‘3%’가 보였다. 찾았다. 상영 당일 전에 예매할 시 7%, 당일 예매는 3%를 적립해주는 게 그들의 입장이었다.(올해부터 바뀌었다고 한다······.) 순간 짜증이 밀려왔다. 할 게 얼마나 많은데 이제 그 많은 영화들을 최소 상영 전날부터 계획을 세워서 봐야하나. 그리고 내가 얼마나 돈..
작은 카페 앞에서 해원이 손에 든 헌 책을 살펴보고 있다. 자신이 과거에 산 책인지 아닌지 생각 중이다. 옆에서 그녀의 엄마가 말한다. “엄마가 하나 사줄게.” “됐어요. 잘못하면 집에 책이 두 권 되잖아요.” 카페에서 나온 한 남자가 그 모습을 보더니 말을 건다. “그 책들, 돈 주고 싶은 만큼만 주시면 되는데·······.” 이어지는 어색한 대화. 그리고 남자가 다시 한 번 말한다. “책들, 진짜 돈 주고 싶은 만큼만 주시면 돼요.” 그러자 해원이 말한다. “그러면, 내가 너무 드러나잖아요.” 그 말을 들은 남자가 멋쩍은 듯 웃는다. 재밌는 대사였다.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말을 직접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돈이 특히 그렇다고 생각했다. ‘주고 싶은 만큼’, ‘줘야 할 것 같은 만큼’, 이것..
늘 그렇지만, 뭔가 될 거라는, 어떻게든 될 거라는 착각을 하는 것 같다.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말한다. “‘시험 때 되면 하겠지. 당연히 할 수밖에 없겠지. 고3 되면 잘 하고 있겠지. 내가 설마 그 학교도 못 들어가겠어?’ 이런 안일한 생각을 하면 안 돼. 불안해야 돼. 불안하지 않고 편안하다면 공부를 제대로 안 하는 걸지도 몰라.” 그럼에도 숙제를 안 해오는 아이들을 보면 답답할 때가 많다. 답이, 방법이 저렇게 있는데, 왜 그대로 안 하는 걸까. 그리고 귀가한 뒤 생각한다. ‘잠깐, 나도 그때 안 해놓고 무슨 소릴 하고 온 거야.’ 하긴 지금 이 동력은 후회에서 온 걸지도 모른다. 불안과 고통이 선명해지면 그제야 깨닫는다. 지금도 아니라고는 못 하겠다.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시간이 있을 때는 아..
그러니까, 4년이 지났다는 거지? 훈련소에서 만난 게 17년도였으니까. 우리 둘 다 두피가 보일 정도로 짧은 머리였고 동갑이었지. 훈련소 식당에서 내가 이렇게 물었어. 영화 좋아하냐고. 너는 고개를 끄덕였어. 마침 심심한데 잘 됐다 싶었고 밥을 먹으면서 영화 얘기를 했지. 얘기가 잘 통했어. 그래서 나는 너의 수준을 가늠하기 위해 평론가 ‘이동진’을 아냐고 물었지. 너는 이렇게 대답했어. “GV에서 여러 번 봤죠” 알고 보니 너는 영화에 미친 사람이었어. 암막과 밤하늘, 두 종류의 천장밖에 없었던 영화광. 그날 이후로 4주의 훈련은 영화와 인문학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채워졌어. 그때를 생각하면, 이상하게도 어떤 포만감을 느꼈던 것 같아. 아, 그리고 수학 이야기도 했었지. 진짜 흥미로운 건 너의 전공이었..
“핸드폰 앞자리가 ‘010’이 아닌 사람들이 아직도 많은가 봐.” 그녀가 말했다. “그럼 ‘투지폰’을 쓴다는 거 아니야? 안 불편한가?” 내가 반응했다. “불편해도 쓰는 거면, 왜 쓰는 거 같아?” 또래 친구들보다 늦게 핸드폰을 샀던 게 생각났다. 돌이켜보면 그 전까지 내가 불편한 것은 거의 없었다. 다만 연락이 안 될 때마다 부모님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이 불편했을 뿐.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젠 ‘없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메신저들이 누군가에겐 ‘가져본 적도 없는 것’일 수도 있다. “하긴, 본인은 불편하지 않을 수도 있겠네.” “그냥 쓰던 걸 계속 쓰고 싶다는 건가.” “그렇지. 일종의 관성처럼. 그리고 핸드폰 바꾸는 것보다 번호 바꾸는 게 더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해. 특히 나이 드신 분들이 좀 더 그..
‘1시간 10분’ 대충 예상한 시간이다. 환승할 필요도 없고 날씨도 좋아 선택한 버스. 하지만 그 긴 시간 때문에 가져온 책도, 창밖도 보지 않는다. 자리가 생겨 앉자마자 유튜브를 꺼냈고 자연스럽게 알고리즘을 따라간다. 하긴, 차 안에서 책을 보다 어지러워 멀미가 났던 경험이 있다. 책은 이따 지하철을 타며 보기로 했다. 창밖, 처음 보는 비슷한 건물들의 연속일 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유익한 영상시청 시간을 만들기로 한다. 그러나 결국 이미 봤던 영상들에까지 손을 뻗는다. 2년 전에 개봉한 영화 의 하이라이트 액션 영상까지 클릭하게 되었다. 액션을 하는 주인공의 배경 속 조연들 몸짓까지 세세하게 신경을 썼는지, 힘을 숨기고 있던 주인공들의 모습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장르적으로 표현했는지를 평가할 생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