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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씁니다 2021. 3. 12.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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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름도 모르는 타인을 눈에 담는다.

사람들은 그것을 ‘훔쳐본다’고 한다. 우리는 지하철에서, 학교에서, 일터에서 저 남자가 보는 영상, 저 여자가 든 핸드백, 그들의 반지, 시계, 그들이 읽는 책, 그들이 가진 핏줄과 머리카락을 훔쳐본다. 그리고 그 조각을 모아 상상의 인물을 만든다. 사람의 껍데기를 몰래 보는 것은 폭력일 수도 있다. 하지만, 껍데기로 채울 수 없는 빈 공간에 상상을 채워 넣는 건 흥미롭다. 재밌는 점은 상상이 어설픈 앎으로 변하고, 종종 어설픈 앎은 우리를 사랑에 빠지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어설프게 알기 때문에 지원하고 싶은 학과가 사랑스럽고, 어설프게 알기 때문에 연예인에게 빠지는 것처럼.

 

2.

완벽한 대칭인 공작나비, 한 쪽 눈이 없는 네페르티티의 흉상.

자, 우리는 어디에 상상을 채워 넣을까?

 

 

 

3.

의경 시절, 사람들을 자주 구경했다.

경찰버스는 짙게 선팅 된 창문을 가져서 지나가는 사람들은 버스 안을 볼 수 없었고 안에 있는 사람은 버스 밖을 볼 수 있었다. 경찰버스 안의 의무경찰은 심심하다. 그러니까, 내가 많이 심심했었다는 얘기다. 나는 경찰버스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대담하게 쳐다봤다. 버스에 숨어서 그들이 코딱지를 파고, 침을 찍- 뱉는 걸 봤다. 그리고 그들의 타고남과 삶의 증거를 보고 추리했다. 심심했으니까. 밖이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사람들이었다.

 

-2018년 9월 25일 일기 중 발췌 -

요리사의 흰 제복. 중식? 일식? 남자는 통화하며 고개만 끄덕끄덕. 청년 같다가도, 아버지의 모습도 보인다. 어깨가 넓고 살집이 두둑하다. 동물로 치자면 황소. 아마 서른여섯? 마흔? 볼이 통통해서 정직하게 늙은 것 같진 않고. 음, 운동은 유도가 어울린다. 부모에게 아주 잘하는 효자일듯. 인문학적 소양? 없을 것 같고 외국어는 일본어 정도 할 것 같다.

 

-2018년 9월 25일 일기 중 발췌-

스물 한살? 스물다섯? 아무튼 한창때의 여자. 엉킴을 모르는 새까만 긴 생머리. 가늘고 긴 다리와 팔, 트위드 재킷, 금빛 단추. 거의 배꼽까지 끌어올린 블랙진, 샤넬 가방. 하얀 복숭아뼈, 검은색 플랫슈즈, 푸른 거미줄이 툭 나와있는 발등. 벤치에 앉아 있다. 좋아했던 과목은 역사와 영어일 것 같다. 동생? 여동생 한 명. 엄마보단 아빠와 친할 것 같은데, 물론 근거는 없고. 그녀의 부모를 놀라게 하려고 그녀를 레즈비언으로 상상해 보기도 한다. 직업은, 의류업? 아니, 의외로 금융권이 어울린다.

 

-2018년 9월 26일 일기 중 발췌-

다리가 길고 깔끔한 헤어. 커피와 담배. 직급은 어떻게 될까, 과장? 싸구려 아침 드라마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배우 같다. 음, 동물로 치자면 하얀 진돗개. 머리숱도 많아 보인다. 동기들에게 부러움을 받겠지. 거기다 통신사 대기업(KT), 부모는 일찍 걱정 덜었다는 것이다. 대학생 때도 그렇고 사무실 안에서 조금만 눈웃음치면 여자가 긴장할 외모. 좋아하는 운동은 농구일 것 같다. 남자는 팔을 비틀어 손목 시계를 확인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4.

하지만 전역을 하니

사람을 구경하는 기회도, 욕구도 사라졌다. 나에게 일과 핸드폰이 있었고 사람을 진득하게 구경하고 상상하는 건 시간과 에너지 낭비였으니까. 사람을 구경하는 재미는 핸드폰을 못 쓰게 했던 경찰 버스 안에서만의 추억이 되었다. 하지만 9월과 10월, 나는 한 사람을 진득하게 구경하고 상상하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그 여자였다. 그녀가 신경 쓰였고 막연한 정보가 상상과 뒤엉켰다.

 

나는 그녀를 몰라서

그녀가 가진 타고남, 삶의 증거를 탐정처럼 관찰했다. 그리고 상상했다. 그녀는 데스크에서 항상 머리를 책에 박고 있었고 일을 쉬는 날엔 큰 흰색 박스티를 입고 창가 쪽에서 아이패드에 무언가를 그렸다. 디자이너? 미대생? 나이는 스물셋? 나는 멋대로 그녀가 조용한 성격이라고 상상했다. 그녀는 안경을 쓰고 편한 검은색 바지나 청바지를 입고 돌아다녔다. 그녀는 꾸미는 것보다 편하게 일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털털한 성격에 검소한 사람일까? 나의 소망과 막연한 정보가 뒤섞였다. 아무튼 나는 그녀가 돌아다닐 때마다 공부에 집중을 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쳐다보고 싶은 강한 충동에 매번 졌다. 그 짧은 시간에 나는 설렘으로 가득 찼고 그녀가 사라지고 나면 씁쓸한 아쉬움이 설렘의 자리를 다시 빼앗았다. 술자리에서 일찍 떠난, 친구의 신비로운 친구처럼 신경 쓰였다.

 



 

by. 얼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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