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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와 달 [1월 : 술에 대하여] 본문

김도겸

해와 달 [1월 : 술에 대하여]

우리도 씁니다 2021. 1. 29.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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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인을 너무 많이 넣었나 보다. 머리가 띵하고 세상이 돈다. 그릇을 물에 담가 두고 소파 위로 떨어진다. 30평 집 안에서 고요가 팽창한다. 기분 좋은 고요의 무게에 눌려 소파 깊숙이 파묻힌다. 눈을 뜨니 엄마가 현관문 앞에 서 있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면서 나를 발견했나 보다. 고개를 젖혀서 주황색 햇빛에 익은 눈으로 이마 뒤를 살핀다. 해가 지고 있다. 해는 아파트에 가려졌지만 여전히 벌떡이고 있었다. 나는 벌떡이는 해의 박동을 느낄 수 있었다.

 꿈틀거리는 해와 꿈틀거리는 조직의 횡단면. 소의 간이 반으로 갈라졌다. 갈라진 조직은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는 것 같다. 송골송골 맺힌 피가 점점 커지다가 뭉쳐지고 이내 주륵 흐른다. 선홍빛 단면 위로 피가 줄기를 이루며 흘러내린다.

 울퉁불퉁한 연회색 시멘트 위에 파란색 접이식 테이블이 자리 잡았다. 테이블은 다리 두 개를 겨우 지면에 붙였을 뿐 나머지 다리 두 개는 허공에 떠 있다. 소의 간이 잘게 썰린 접시가 테이블 위에 놓이자 테이블은 간신히 네 다리를 시멘트에 내려놓을 수 있었다.

 벌초를 마치고 어른들은 도살장으로 갔다. 도살장에서 갓 잡은 소의 간을 도살장 옆에 나열된 테이블로 가져왔다. 명절마다 보는 친척들과 명절 때만 보는 종친회 어른들 틈에서 나는 간을 보고 있었다. 간 위로 모락모락 김이 올라왔으니 추석이 아니라 설을 위한 벌초였으리라.

 선산에 따라가고 벌초도 함께한 아이들을 위해 어른들은 상을 줬다. 잔의 바닥이 보일 정도로 법주를 따라줬다. 아이들은 어른의 음료를 마시기 위한 10년을 절약한 기쁨에 들떴다. 법주의 향이 퍼졌다. 솔내음이 났다. 테이블에 낮게 깔린 향을 빨아들이기 위해 테이블에 턱을 댔다. 나는 잔 너머로 큰아버지를 보고 있었고 큰아버지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 옆에서 형이 한 잔을 들이켠다. “캬~” 어른의 소리를 따라 했지만 표정은 일그러졌다. 형은 혀를 내밀고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커서 술 안 마실래.” 형을 보고 호기심이 동해서 법주를 목 안으로 털어 넣었다. 법주는 잔에 깔려있을 때와 다른 향을 냈다. 위에서 식도를 타고 코로 올라온 법주는 찔렀다. 동시에 목이 타는 듯했다. 평소에 맡아보지 못했던 자극을 길게 느끼려고 숨을 코로 내뱉었다. 곧 있으니 몸이 따뜻해지고 피가 손과 발끝으로 퍼지는 듯했다. “너는 나중에 많이 마시겠다.” 큰아버지가 웃으며 말씀하셨다. 나는 취해서 얼굴이 붉어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거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해는 울음을 그치고 하늘은 짙은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구수한 밥 냄새가 나더니 전기밥솥에서 알림이 울린다. 따뜻한 밥을 먹고 시원하게 샤워했다. 소파에서 자며 땀을 조금 흘렸기 때문에 샤워는 개운했다. 냉장고를 열어 맥주를 하나 꺼냈다. 블루문.

 이 맥주는 이름을 잘 지었다. 낯선 이름의 맥주의 상큼한 향과 맛을 음미하다가 이름을 다시 떠올렸다. 파란 달. 같이 마시던 친구가 깜짝 놀라서 탄성을 질렀다. 우와.

 다시 한 모금을 들이켜 본다. 입안에서 블루문을 굴리면서 쇼팽의 녹턴 op.55 1악장을 생각한다. 1악장의 끝자락, 호수 언저리에 자갈이 물결에 부딪힌다. 달빛을 받아서 자갈이 빛난다. 배를 내어 호수를 건너야 한다. 이제 드뷔시의 달빛으로 넘어간다. 호수에 비친 달이 동그랗다. 내일 아침까지 호수 건너편에 닿을 수 있을까. 배 위에 탄 탈영병과 여자는 추적을 걱정한다. 날은 쌀쌀하고 보름달이 둥글다. 달빛만으로도 세상은 밝아질 수 있구나. 푸른빛이 입안을감싼다.

 

 

 

 

by. 김도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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