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수필 (28)
우리도 씁니다
1. 그것은 2020에 찍힌 쉼표였다. 쉼표 너머에 풍경이 보인다. 가해자가 환자인 풍경. 마스크가 x의 1제곱처럼 새삼스럽지 않은 풍경. 지하철에서 동시에 메아리치는 재난문자로 지역주민인 걸 알게 되는 풍경. 유치원 아이들이 마스크를 코에 꾹 누르는 기술을 완벽하게 연마하는 풍경. 대학교 책상 서랍에 거미줄이 쳐지고 청춘이 생략되는 풍경. 깔끔한 지옥이 된 상가의 풍경. 사람들이 사람들을 주춤거리게 하는 풍경. 찝찝함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풍경. 나가고 싶다는 공동체의 처절한 욕구와 거리두기 정책이 대립하는 풍경. 경제와 방역이 대립하는 풍경. 양성과 음성이라는 이진법이 팽팽하게 긴장된 줄을 선 사람들의 운명을 가르는 풍경. 이런 풍경이 계속되는 원인은 명확했다. 백신의 부재, 백신의 부재, 백신의 ..
"OO해." 내가 말했다. "뭐야?" 그녀가 당황했다. "새로 만든 단어야. ‘사랑해’보다 더 사랑한다는 뜻이야." "(웃음) 이상해." "그래?“ 사실 나 역시 ‘OO’이란 발음이 억지스럽다고 생각했다. 내가 먼저 물었나? 아마 그랬던 것 같다. 새벽의 통화에서였다. 나 말고 마지막 연애가 언제였냐는, 그런 식의 질문을 했다. 그녀는 내가 상처받을 것 같다는 말을 하며 주저했다. 그러다 혼자서만 간직하던 과거를 토해냈다. 내가 그녀에게 처음 말을 걸었을 땐 이미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나에게 이런 말을 해대겠지. 멍청한 놈. 그런 걸 왜 물어봐? 그러게 말이다. 결국 나는 가학적인 상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바로 내가 요즘 듣고 있는 '사랑해'가 그녀 입에서 음..
결혼생활은 세금 같았다고 한다. 기쁜 일 뒤에 오는 골칫덩어리였으니까. 행복은 딱 상상에서 멈췄다. 결혼‘생활’은 지금 가정이 결함 있는 인격체끼리 만나 이룬 것임을, 결혼생활에 재능이 없는 사람끼리 만난 것임을 깨닫게 해줬다고 한다. 그러다 딱 하나의 치명적인 사건으로 인해 그녀는 이 결혼생활이 ‘세금’이 아니라 ‘잘못 산 복권’ 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정떼기’ 경쟁에 돌입했다. 그리고 두 가지 선택지가 그녀 앞에 놓였다. 하나는 견디는 것. 다른 하나는 끝내는 것. 전자는 기혼, 후자는 이혼이었다. 그녀는 후자를 선택했다. 그녀는 바로 법원으로 돌진했고, 서류와 때려치우고 싶은 충동을 함께 움켜쥔 채 빠르게, 배짱 있게 절차를 돌파했다. 그리고 끝. 끝났다. 모든 것이 마무리되었다. 식장에서..
1. 그때 카페에서, 우리는 검은 소파에 앉아있었고 빛은 창문을 뚫고 들어와서 뺨의 솜털과 곰지락거리는 손가락, 그리고 손에 들린 컵을 비췄다. “그거 들었어?” 그녀는 나에게 최근에 일어난 범죄를 이야기해 줬다. 용의자는 아이의 엄마. 용의자의 DNA 검사. 99.9% 일치. DNA 검사를 반박하는 용의자. 용의자를 반박하는 과학수사. 그녀는 진지하고 흥미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는 유전학을 전공한 사람이었다. 2. 나는 생각했다. 과학수사? 맞아, 얘 집 10분 거리에 과학 수사대가 있었지. 그러자 어떤 이미지 하나가 툭 떠올랐는데, 그 이미지는 묘사할 수 있을 정도로 뚜렷했다. 무대가 과학 수사대였다. 시간은 깜깜한 밤, 인물은 우리 둘과 지나가는 남자들. 크고 작은 소품들도 떠올랐다. 검은색 패..
친구가 1년 동안 사귄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말한다. “나 수진이를 좋아하지 않았던 거 같아.” “거짓말. 너 걔랑 처음 사귈 때 입이 귀에 걸려 있었어.” “그거 연기한 거야.” “지랄.” “적어도 나는 기억이 안 나. 사랑은 영원할 수 없나 봐. 처음에는 너가 말한 것처럼 정말 좋았을 수도 있어. 그런데 그게 깎이고 깎여서 결국에는 기억조차 안나.” 친구는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에서 조엘은 사랑했던 연인 클레멘타인의 기억을 지운다. 하지만 기억은 지워도 클레멘타인과 함께 했던 감정은 지울 수 없었다. 아니면 기억을 지우는 장치가 무의식까지 간섭하지는 못했거나. 어쨌든 조엘은 결국 클레멘타인을 잊지 못하고 다시 사랑을 고백한다. 친구의 기억은 조엘과 다른 순서로 지워졌다. 조엘의 기억은 가장 좋지 ..
♬OST: 김광민 - 작은 배 1. “나 왜 사랑해?” 전기장판을 틀면서 내가 물었다. “음...널 사랑하는데 이유가 어딨어.” 그녀가 대답했다. 이번엔 그녀가 질문했다. “넌 날 왜 사랑하는데? ” 2. 누군가 ‘자신을 왜 사랑하냐’고 물을 때, 대부분은 잠깐 당황한다. 당황한 사람은 청문회의 어벙한 장관 후보자처럼 어눌하게 뜸을 들이고, 물었던 사람의 눈동자는 어서 말해 보라며 무언(無言). 답할 사람은 클리셰(Cliché)를 사용할지, 독특한 답을 할지, 거짓의 성벽으로 사랑의 땅을 보호할지, 지금 생각한 답이 뒷감당을 할 수 있을지를 계산하고, 의문만 키우는 신중한 침묵이 너무 길지 않을까 걱정한다. 침묵은 배신이니까. 3. 순간 수 많은 선택지들이 눈 앞에 보인다. “인간성이 참 마음에 들어.”..
♬방준석 - [남과 여 OST]. https://youtu.be/f2N4QH7T460 1. 계절은 우리를 질투했다. 물론, 우린 개의치 않았다. 한여름의 볕은 열기와 습함으로 맞잡은 두 손을 위협했지만, 후후 열을 식힐 지언정 그 손을 놓아야겠다는 선택지는 우리에게 없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한기가 아직은 낯선 가을, 미처 챙기지 못한 외투가 아쉬운 것은 내 감기보단 네가 느낄 추위가 걱정스럽기 때문이었다. 온 세상을 얼릴 듯 차가운 바람이 코 끝을 얼리더라도, 한참을 안고있어도 될 듯한 핑계를 주는 것 같아 겨울에겐 되려 고맙기도 했었다. 나의 계절은 너와의 기억으로 가득 차있다. 하지만, 이제 너로 가득한 내 계절들을, 그 순환인 일년을, 아니 몇 해를 모두. 단단히 묶어 네게 보낸다. 닿으면 전기라도..
아직 추운 날이었다. 지나가는 대학생들의 대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어색한 밤이었다. 젖은 바닥을 긁으며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도 들렸다. 준비한 말이 나오려다 목에 걸려 대롱대롱 흔들렸다. 다음에 말할까? 아니다. 오늘은 말해야 한다. 저기 걸어오는 학생들이 지나가고 나면 이야기해야지. 저기 보이는 버스정류장을 지나면 이야기해야지. 해야지, 해야지. 쑤욱. 내 팔 속으로 너의 팔이 들어왔다. 풍선에 바람이 빠지듯 나의 말이 나왔다. “우리 사귈래?” “그래.” 고개를 돌려 너를 보지는 못했지만 너는 소리 없이 웃었다. “오늘 그 말을 하려고 했어?” 너가 물었다. “아니. 다른 말을 하려고 했어.” “무슨 말을 하려고 했어?” 너가 다시 물었다. “나 너 좋아해.” 이번에는 고개를 돌려 너를 봤지만 너가 ..
1. 를 시작한 지 다섯 달. 매주 멤버에게 글 피드백을 받는다. “이건 무슨 뜻이야?”, “이 표현 억지야”, “이렇게 고치는 건 어떨까?” 피드백을 받을 때마다 혼자 볼 때 보이지 않았던 어처구니없는 문장이 보인다. 어젯밤에 속으로 외쳤던 ‘완벽해’라는 말은 허무하게 폐기처분된다. 이해가 가지 않은 적도 있었다. ‘왜 너는 이해를 못 하지?’ 고집도 있었다. ‘너를 위해 내 말을 포기해야 하나? 하지만 그런 똥고집만 부릴 거면 일기나 쓰는 게 낫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2.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와 「개발자의 글쓰기」를 읽었다. 두 책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나는 글쓰기의 본질은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글은 상대방과 소통하고 교감하도록 만들어져야 하는 ‘도구’라는 것. 다시 말해, 글은 다른..
우씁니다 페이지에 글을 연재하기 시작한지 네 달 정도 흘렀다. 매주 하나씩 글을 쓰는 데에도 조금은 익숙해졌다. 하지만 익숙해진다고 글을 쓸 때 들어가는 시간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어떤 때는 세 시간 만에 써 버리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며칠을 공들여 쓰기도 한다. 레베카 솔닛은 맨스플레인에 대한 에세이 를 쓸 때 순식간에 썼다고 한다. 는 자신을 가르치려 드는 남성에 대한 일화로 글을 시작한다. 이 남성은 솔닛의 말을 중간에 끊으면서 권위적인 태도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나중에는 한 책을 꼭 읽어야 한다고 역설하는데, 그 책은 솔닛이 쓴 책이었다. 글은 곧장 강간 문화와 여성의 생존권으로 흘러간다. 여성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고 신빙성 없는 이야기라고 여기는 사회이기 때문에 데이트 폭력이나 강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