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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씁니다
“나도 왕년에는” 박은 숨을 후 내쉬고 말을 이었다. “비 좀 맞았어.” “비? 학점 말하는 거야?” 나는 무슨 말을 하냐는 표정으로 물었다. “야 너가 비만 많이 맞았냐? 씨도 많이 맞았지. 아주 흠씬 두들겨 맞았지.” 전이 술집의 시끌벅적한 소음에 한 몫 더하며 외쳤다. “아니! 레인 말하는 거잖아. 하늘에서 내리는 레인.” 박이 웃으며 말했다. “대학생 때는 비 맞는 거 좋아했거든. 아니 지금도 싫어하지는 않아. 오히려 맞고 싶어. 그런데 지금은 비를 맞으려면 작정을 해야 한단 말이지. 포마드스타일로 머리를 빗어 올리고 왁스를 바르면서, 가방에 512기가바이트 맥북 프로를 들고 다니면서, 천연가죽으로 만든 구두를 신으면서, 결정적으로 자동차를 타면서 비를 맞을 수 없게 되어 버렸어.” 대학 시절에 ..
QUIZ {G와 R} 1.1 G는 왕이다. 지구 껍데기 위의 모두가 G의 식민지다. G는 위에서 아래로 우리를 짓눌러 위와 아래를 가르치고 예의를 알려준다. 꾸준하고 한결같다. 어제보다 강하거나 내일 약해지지 않는다. 왕 때문에 핸드폰을 얼굴에 떨어뜨리고, 왕 덕분에 컵에 커피를 따를 수 있으며, 왕 덕분에 둥근 지구에서 ‘자꾸 걸어나가’도 떨어지지 않고 외국인을 만날 수 있다. G, 우리의 왕, 이것을 막을 방법도, 피할 땅도 없다. 이것은 약속이다. 1.2 수평선에서 배가 사라지는 것, 개기월식, 개기일식을 보고 몇몇 영민한 사람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걸 눈치챘다. 하지만 왜 사람들이 떨어지지 않는지는 알지 못했다. 윌리엄 길버트(William Gilbert)는 자석을 떠올렸다. 달과 지구, 지구와 태..
연말이 되면 조금 설렌다. 크리스마스에 선물 받을 나이는 훨씬 지났으면서 캐롤을 들으면 언제나 설렌다. 시끌벅적한 송년회에서는 한동안 못봤던 친구들을 만나서 못다한 이야기들을 나눈다. 비록 올해에는 잘 해결되지 않았던 일들이 내년에는 잘 해결될 거다. 뉴스에서는 여자 엥커가 평소와는 다르게 들뜬 목소리 톤으로 제야의 종 타종 행사 상황을 보도한다. 오늘 하루만큼은 여자 엥커도 목소리를 깔지 않아도 된다. 올해도 다사다난했지만 결국은 해피엔딩이다. 우리와 다르게 수천만 년 전에 살았던 고대인들은 추운 겨울이 영원히 지속되진 않을까 두려웠을 거다. 몇백 번의 밤 전에도 엄청 추운 날들이 있었지만 몇십 번의 밤을 보내고 나니 따뜻해졌다. 하지만 이번에도 따뜻해질 거라고 어떻게 보장해? 확실히 하고 싶었을 거다..
중대재해 무발생 150일째. 건설 현장에 처음 출근하면 받아야 하는 안전교육을 받기 위해 교육장에 모여서 처음 본 팻말이었다. 그러니까 이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사람이 죽거나 크게 다쳤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교육자는 이 현장에서 사람이 죽었다고 말했다. 건설 현장에서 일을 하기 위해서는 기초건설안전교육을 받아야 한다. 이 교육에서 교육자는 한 영상을 보여줬다. 멀리에 있는 CCTV에 찍힌 건설 현장의 모습이었다. 사람은 개미처럼 작았고 수십 톤이 넘는 건축 자재는 레고처럼 보였다. 타워크레인으로 건축 자재를 들어 올리는데 중간에 줄이 풀렸다. 레고처럼 건축 자재가 통통 튀었고 개미 같은 사람이 맞고 쓰러졌다. 마찬가지로 중대재해 사고 현장이었다. 다시 말해서, 레고 같은 건축 자재에 맞은 개미 같은 사람..
서울에서 가장 높은 건물 롯데타워. 높은 건물은 어디에서나 눈에 띄어서 도시의 랜드마크가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롯데타워는 어디에서도 볼 수 있지만 가까이서 본 사람은 많지 않다. 지하철에 연결된 지하도를 통해서, 지하주차장의 엘리베이터를 통해서 건물에 들어가니 거대한 건물을 실제로 보기는 쉽지 않다. 롯데타워 뿐만이 아니라 다른 거대 구조물도 마찬가지다. 서울에 있는 대교, 고가도로, 높은 빌딩, 한강의 크기를 느낄 기회는 많지 않다. 언제나 차를 타고 거대 구조물을 지나치니까. 거대 구조물의 크기를 느끼기 위해서는 속도를 줄여야 한다. 마포대교를 걸어서 건너본 적이 있다. 전철이나 버스를 타고 지날 때는 1분 만에 건널 수 있었는데 걸어서 건너려니 15분이 넘게 걸렸다. 대교大橋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
내가 사는 안암에서 한양대학교까지 자전거를 탈 때 크게 세 가지의 길이 있다. 나는 그중에서 청계천을 따라가는 길을 가장 좋아한다. 나는 이 길을 청계천 하이웨이라고 부른다. 청계천 하이웨이는 자전거 전용도로다. 뒤에 있는 자동차가 클랙슨을 울릴까 봐 빨리 달릴 필요가 없다. 그리고 하이웨이답게 신호등이 없다. 한번 받은 신호를 계속 받으려고 조바심을 내지 않아도 된다. 초가을 아침 청계천 하이웨이는 모든 것의 경계가 뚜렷해진다. 듬성듬성 군락을 이룬 갈대는 검은색 테두리라도 있는 것처럼 그 뒤의 청계천과 구분된다. 청계천 하이웨이 위로 펼쳐진 고가도로 사이로 비치는 햇빛은 밝음과 어두움을 칼로 베어버린다. 고가도로가 구름 걷히듯 사라지면 학교에 거의 다 온 것이다. 이제 경계는 햇빛 속으로 사라진다. ..
애인 있는 사람을 사랑해본 적 있나요. 언젠가 한 친구는 애인이 있는 사람이라면 친구 이상의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저도 그렇습니다. 알랭 드 보통은 우리가 어떤 사람을 충분히 알기도 전에 사랑에 빠진다고 합니다(‘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맞습니다. 연애를 시작하면 언제나 썸탈 때까지는 보이지 않던 게 보이고, 봤던 것도 다르게 보입니다. 연애 초반에는 그런 면이 좋다가, 나중에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싫증이 납니다. 그런데 저와 제 친구는 그 사람에게 애인이 없는지를 확인해야 사랑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희 둘의 생각과 보통의 생각이 부딪히지는 않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얻기 전에 사랑에 빠지지만, 적어도 애인이 있는지는 알아야 사랑에..
가시 돋친 존댓말이 오갔다. 나는 팀 발표의 Q&A 시간에 자주 질문을 한다. 그날도 발표에서 미흡한 점을 지적하며, 근거로 삼은 표에 대해 질문했다. 발표자는 붉어진 얼굴로 대답했지만 부족했다. 나는 다시 질문했다. 강의실 안 80명을 침묵시킨 나의 질문을 교수가 중단시켰다. 교수는 다음 발표로 넘어가기 전 쉬는 시간을 줬다. 쉬는 시간에 방어 기제가 작동했다.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이상한 것은 내 질문을 공격으로 받아들인 발표자였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다른 일을 하다가도 화가 난 발표자의 얼굴과 목소리가 자꾸 떠올랐다. 일주일이 지나 발표가 있었던 수업이 다시 돌아왔다. 아무렇지 않은 척 강의실로 들어가서 수업 준비를 했다. 친구 한 명이 내게 다가와 오늘 자신의 발표 때는 질문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