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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겸

내 것

우리도 씁니다 2021. 3. 19.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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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내가 쓰던 물건들은 대부분 누군가가 쓰던 물건들이었다. 형이 입었던 바지, 옆집 형이 탔던 자전거, 아래층 누나가 가지고 놀았던 소꿉놀이 세트를 조금 늦게 태어났다는 이유로 내가 물려받았다. 그래서 나는 가끔 ‘내가 제일 먼저 태어났더라면…’하고 생각했다. 내가 제일 먼저 태어났으면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물건들을 오직 나만을 위해서 사야했을 테니까.

항상 남이 사용하던 물건을 썼기 때문에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새 물건을 동경했다. TV 광고에 나온 장난감은 완벽해 보였다. 글라스데코는 한 번도 짜지 않아 꽉 차 있었고 소꿉놀이 세트는 빳빳한 박스 안에 들어가 있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저런 완벽한 물건을 어떻게 사용했길래 옆집 형과 아래층 누나는 물건에 때를 입혔을까. 나라면 그러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리 글라스데코를 사용해도 줄지 않을 줄 알았다. 소꿉놀이 세트에 있는 당근을 아무리 플라스틱 칼로 썬다고 해도 당근을 붙이고 있는 찍찍이는 영원할 거라 믿었다.

산타가 나에게 기회를 줬다. 드디어 나도 완벽한 물건, 광고에 나온 그 물건을 가질 수 있었다. 나는 그동안 가지고 싶었던 공룡 모형 세트를 얻었다. 공룡 세트는 플라스틱 케이스 안에 조심스럽게 포장되어 있었다. 케이스를 뜯고 스테고사우르스 모형을 형광등 불빛에 비추어 봤다. 스테고사우르스는 아무런 흠집없이 빛났다.

하지만 스테고사우르스 모형은 곧 흠집이 났다. 나는 충격을 먹었다. 산타가 준 선물이 광고에 나온 것과 다른 상품인가? 엄마가 요새 돈이 없다고 했던 것처럼 산타도 재정난에 시달려서 나에게 짝퉁을 줬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음 해에도, 그 다음 해에도 산타가 준 선물은 항상 흠집이 나거나 고장이 났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나는 새 물건이 비록 광고에 나온 상품이라 할 지라도 흠집이 나고 고장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래도 새 물건은 언제나 신선한 기분을 줬다. 다른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깨끗한 물건을 손에 쥐는 그 순간만은 언제나 기뻤다. 그리고 깨끗한 물건에 흠집이 날 때는 기뻤던 것 보다 더 많이 슬펐다.

 

군대에서 전역하고 두 달 간 건설현장에서 일을 했다.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서 하루 종일 수십kg이 넘는 파이프를 옮겼다. 집에 돌아와서 샤워를 하면 머리에서 검정색 구정물이 흘렀고 코에서는 검정색 코딱지가 나왔다. 두 달이 지났을 때 통장에는 수백만 원이 찍혔고 나는 맥북 프로를 주문했다. 맥북 프로가 도착했을 때 목욕을 하고 맥북 앞에 섰다.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것을 확인시켜 주는 봉인 라벨을 뜯고 비닐을 헤치고 맥북을 들었을 때, 노동의 수고가 모두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고, 내가 실수로 책상을 치며 선반 위에 세워 놓았던 거울이 맥북 위로 떨어졌다. 거울이 액정을 긁었고 모서리 구석을 부쉈다. 부욱. 가슴이 찢어졌다. 평소에 잘 하지 않던 욕을 했다. 처음엔 거울을 쳤던 나를 탓했고 그 다음엔 선반 위에 거울을 올린 나를 탓했다. 내 탓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맥북으로 교환할 수 없었다.

 그런데 몇 개월이 지나니 이상하게 상처난 맥북에 더 정감이 갔다. 누가 상처나지 않은 새 맥북과 바꿔준다고 해도 고민할 것 같았다. 비합리적이다. 시장에서는 물론이고 나한테도 가치는 새 맥북이 더 높은데 왜 고민이 되지?

 공장에서 나올 때 맥북은 모두 같은 모양이었다. 그 중 어떤 것이 내 것이 된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중 하나의 맥북이 우연히 나에게 와서 내 것이 되었다. 실수로 내가 맥북에 상처를 입혔을 때 이 맥북은 다른 맥북과 완전히 구분된 내 것이 되었다.

생각해보면 뒤섞인 공산품에서 내 것을 찾는 표시는 항상 어딘가 부족한 점들이었다. 수요일에 나오는 맛있는 점심을 먹고 운동장에서 교복 자켓을 잠깐 벗어두고 원바운드를 하고 나서, 내 교복을 찾게 해주는 것은 찢긴 자국이었다. 엄마가 세발뜨기로 대충 기워둔 바지 밑단, 친구와 장난을 치다 단추가 떨어진자켓 소매가 내 교복의 표시였다.

새로운 사람을 만났다. 관계는 아무런 상처가 나지 않아서 광이 난다. 나에게 연애 고민을 자주 털어 놓던 친구에게 물었다. “이 좋은 거 하면서 왜 그렇게 힘들어 하는 거야?” “너도 곧 알게 돼.” 그렇겠지. 한 사람이 말 실수를 할 거고 한 사람은 입을 닫고 고개를 떨구겠지. 그리고 몇 달이 지났을 때 또 그 이야기를 꺼내겠지. 관계는 상처나고 흠집이 날 거다. 마찬가지로 관계를 시작하며 기뻤던 것보다 더 슬플 거다.

그래도, 상처가 났기 때문에 더 정이 갈 거다. 상처는 이 관계를 가능성으로만 남아 있는 관계들과 구분되게 하고 더 소중하고 특별하게 만들 거다.

 

 

 

by. 김도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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