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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겸

'사랑해'와 디플레이션

우리도 씁니다 2021. 2. 3.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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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싶어서 준비해 간 휴지를 다 쓰고 마지막 남은 휴지를 다섯 번이나 접었다. 휴지를 더 많이 챙겨올걸. 휴지를 여섯 번째 접으니 콧물이 새어 나왔다. 너에게 마지막으로 ‘사랑해’를 던졌고 너는 내가 던진 ‘사랑해’를 맞고 꿀럭였다.

 방에 돌아와서 사진을 지웠다. 편지를 꾸기고 선물을 꺼내고 반지를 버렸다. 쓰레기봉투가 아직 절반은 남아 있었지만 묶어서 내다 버렸다. 방 안이 쌀쌀했고 발이 시려웠다. 의자를 젖혀 천장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다 속에서 두 번이나 걸렸다.

 그동안 너무 많이 ‘사랑해’를 찍어낸 탓인지 ‘사랑해’는 너를 감동시킬 수 없었다. 다 쓰지도 못하고 남아버렸다. 그렇지만 물건은 버려도 ‘사랑해’는 버릴 수가 없었다. 

 혹시 모르니까 그동안 ‘사랑해’를 은행에 맡겨 둬야겠다. 은행에 통장을 만들어서 남은 ‘사랑해’를 저축했다. 갑자기 끊겨버린 공급에 ‘사랑해’의 가치가 올라갈 것이다. 네가 돌아왔을 때, ‘사랑해’는 우리가 떨어져 있을 동안 쌓인 공허함을 전부 채워줄 거다.

 하마터면 헤어진 다음날에 바로 전화를 할 뻔했다. 안 되지. 인플레이션으로 가치가 너무 낮아져 버린 ‘사랑해’가 다시 힘을 얻기까지 하루는 너무 짧으니까. 일주일이 지났을 때 눈사람으로 바뀌었던 프로필 사진이 다시 너의 사진으로 돌아왔다.

 떨어지는 기분을 일주일 더 참은 뒤에 너에게 전화를 걸었다. 용기를 얻기 위해 술을 아주 조금 마셨다. 몇 번 안부를 주고받다가 내가 말했다.

 “사뢍해.”

 이제 네가 대답만 하면 된다.

 “이제 진짜 전 남자친구같네.”

마른 목소리로 네가 대답했다.

 아 실수. 디프레이션이 아니라 스태그플레이션. 물가는 전혀 낮아지지 않았다. 내 기분이 침체된다고 ‘사랑해’의 가치는 높아지지 않는다. 내 ‘사랑해’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들은 물가가 낮아지는 것을 좋아할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월드콘의 가격은 300원에서 2500원으로 오르기만 했는데 1500원으로 낮아진다면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나. 그런데 경제학자들은 인플레이션보다 디플레이션을 더 싫어한다. 그리고 디플레이션보다 스태그플레이션을 더 싫어한다.

 인플레이션 때 물가가 비싸지지만 경기가 좋아진다. 디플레이션 때는 물가가 싸지지만 경기가 침체된다. 스태그플레이션 때에는 물가가 상승하는데 경기마저 침체된다. 상상해봐라. 월드콘이 5천 원으로 올랐는데 용돈은 깎이는 상황을.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에는 정부가 대책을 마련할 수라도 있다. 그런데 스태그플레이션 때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이때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자칫 잘못 손을 댔다가 물가가 치솟아 버리거나 경기가 곤두박질칠 수 있다.

 

 전 남자친구가 되고 나서 ‘사랑해’는 단순한 음절의 조합이 되었고 내 기분은 손쓸 수 없이 침체되었다.

 

 

 

 

by. 김도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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