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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씁니다
1. 그 동네에는 빵집이 있다, 모녀가 운영하는. 한 달에 두 번, 대형 마트의 휴무는 매출의 증가를 확연히 보여주었고, 얼마 안 있어 마트가 리뉴얼하며 매장에 빵집이 없어졌다. 매출의 증가를 확신한 딸은 엄마에게 차를 바꿔도 되겠다는 농담을 건넨다. 엄마는 무미건조하게 답한다. “근처에 빵집 하나 곧 생길걸” 그녀의 말대로 동네에 빵집에 두 개가 더 생겼다. 게다가 하나는 정류장 앞에. 2. “참 공부하기 좋은 세상이야.” 부모님을 포함해 어른들로부터 자주 듣던 말이다. 늘 뒤에는 ‘그러니까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지겹도록 듣는 대사 때문에, 앞선 말은 본론을 말하기 전 들려오는 헛기침 같은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지금은 ‘스터디 카페’를 나오면서 내 입으로 중얼거린다. 공부는 늘 어딘가에 짱박혀 하..
작은 카페 앞에서 해원이 손에 든 헌 책을 살펴보고 있다. 자신이 과거에 산 책인지 아닌지 생각 중이다. 옆에서 그녀의 엄마가 말한다. “엄마가 하나 사줄게.” “됐어요. 잘못하면 집에 책이 두 권 되잖아요.” 카페에서 나온 한 남자가 그 모습을 보더니 말을 건다. “그 책들, 돈 주고 싶은 만큼만 주시면 되는데·······.” 이어지는 어색한 대화. 그리고 남자가 다시 한 번 말한다. “책들, 진짜 돈 주고 싶은 만큼만 주시면 돼요.” 그러자 해원이 말한다. “그러면, 내가 너무 드러나잖아요.” 그 말을 들은 남자가 멋쩍은 듯 웃는다. 재밌는 대사였다.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말을 직접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돈이 특히 그렇다고 생각했다. ‘주고 싶은 만큼’, ‘줘야 할 것 같은 만큼’, 이것..
취업이 걱정되는 게 아니겠지. 대기업에 취업하지 못할까봐, 사무직으로 일하지 못할까봐 걱정하는 거겠지. 그도 그럴 게 제조업과 현장직이 존중받지 못하는 시대니까. 시장논리에 의해서 결정된 거니까 어쩔 수 없다고? 수요와 공급이 우연히 만나 결정된 노동의 가격을 존중의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 우연은 능력이 아니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하는 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 유리 한 장으로 갈리는 아래에서 고층 빌딩 안을 쳐다보면 유리가 빛을 반사할 뿐이다. 유리에는 다른 빌딩의 모습이 반사될 뿐 빌딩 안은 비치지 않는다. 그러나 철로 된 것처럼 보이던 유리도 결국은 유리다. 가까이에서 들여다 보면 그 안이 보인다. 에서 주인공 쇼코는 괜찮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에 실패한다. 또 면접을 실망스럽게 본 쇼코..
아직 추운 날이었다. 지나가는 대학생들의 대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어색한 밤이었다. 젖은 바닥을 긁으며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도 들렸다. 준비한 말이 나오려다 목에 걸려 대롱대롱 흔들렸다. 다음에 말할까? 아니다. 오늘은 말해야 한다. 저기 걸어오는 학생들이 지나가고 나면 이야기해야지. 저기 보이는 버스정류장을 지나면 이야기해야지. 해야지, 해야지. 쑤욱. 내 팔 속으로 너의 팔이 들어왔다. 풍선에 바람이 빠지듯 나의 말이 나왔다. “우리 사귈래?” “그래.” 고개를 돌려 너를 보지는 못했지만 너는 소리 없이 웃었다. “오늘 그 말을 하려고 했어?” 너가 물었다. “아니. 다른 말을 하려고 했어.” “무슨 말을 하려고 했어?” 너가 다시 물었다. “나 너 좋아해.” 이번에는 고개를 돌려 너를 봤지만 너가 ..
1. 이름도 모르는 타인을 눈에 담는다. 사람들은 그것을 ‘훔쳐본다’고 한다. 우리는 지하철에서, 학교에서, 일터에서 저 남자가 보는 영상, 저 여자가 든 핸드백, 그들의 반지, 시계, 그들이 읽는 책, 그들이 가진 핏줄과 머리카락을 훔쳐본다. 그리고 그 조각을 모아 상상의 인물을 만든다. 사람의 껍데기를 몰래 보는 것은 폭력일 수도 있다. 하지만, 껍데기로 채울 수 없는 빈 공간에 상상을 채워 넣는 건 흥미롭다. 재밌는 점은 상상이 어설픈 앎으로 변하고, 종종 어설픈 앎은 우리를 사랑에 빠지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어설프게 알기 때문에 지원하고 싶은 학과가 사랑스럽고, 어설프게 알기 때문에 연예인에게 빠지는 것처럼. 2. 완벽한 대칭인 공작나비, 한 쪽 눈이 없는 네페르티티의 흉상. 자, 우리는 어..
박은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무심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유머러스하다. 그래서 과에서 인기가 많았다. 그런데 바로 그 무심한 성격 때문에자신을 향한 호감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호감을 표현하지도 못했다. 나와 전은 옆에서 답답해하며 이런 저런 조언을 해주기도 했지만 박은 알아들은 체 하고는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번도 연애를 해보지 못 한 채로 두 학년을 다니고 박은 군대를 가버렸다. 그 뒤를 따라서 전과 내가 순서대로 입대했다. 2010년 2월 내가 셋 중에 마지막으로 제대하고 캠퍼스를 찾았을 때, 박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전의 설명에 따르면 박은 제대하고 스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그녀를 만났다. 둘은 리프트 아래에서 리프트 이용권을 검사했다. 10시간 가까이 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집 가 출판되자 마자 베스트 셀러가 됐다. 나는 2020년 2학기에 일본어 공부를 해볼 요량으로 번역본이 출판되기 전에 원서를 사서 웬만한 사람보다 일찍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2학기가 끝나기 전에 이 책을 다 읽자고 목표를 세웠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결국 2020년이 끝날 때 책의 절반 정도를 겨우 읽었다. 한학기 동안 이 책을 읽느라 끙끙대는 동안 번역서가 나왔고 일본어를 모르는 한국의 독자도 하루키의 최신 단편집을 읽을 수 있게 됐다. 많은 사람이 나보다 늦게 를 읽기 시작해서 일찍 다 읽었다. 2020년 마지막 밤에 다른 사람들처럼 시상식이나 음악 방송을 보며 치킨에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2020년이 3분 남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런가보다 했다. 그러다 카운..
QUIZ {G와 R} 1.1 G는 왕이다. 지구 껍데기 위의 모두가 G의 식민지다. G는 위에서 아래로 우리를 짓눌러 위와 아래를 가르치고 예의를 알려준다. 꾸준하고 한결같다. 어제보다 강하거나 내일 약해지지 않는다. 왕 때문에 핸드폰을 얼굴에 떨어뜨리고, 왕 덕분에 컵에 커피를 따를 수 있으며, 왕 덕분에 둥근 지구에서 ‘자꾸 걸어나가’도 떨어지지 않고 외국인을 만날 수 있다. G, 우리의 왕, 이것을 막을 방법도, 피할 땅도 없다. 이것은 약속이다. 1.2 수평선에서 배가 사라지는 것, 개기월식, 개기일식을 보고 몇몇 영민한 사람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걸 눈치챘다. 하지만 왜 사람들이 떨어지지 않는지는 알지 못했다. 윌리엄 길버트(William Gilbert)는 자석을 떠올렸다. 달과 지구, 지구와 태..
연말이 되면 조금 설렌다. 크리스마스에 선물 받을 나이는 훨씬 지났으면서 캐롤을 들으면 언제나 설렌다. 시끌벅적한 송년회에서는 한동안 못봤던 친구들을 만나서 못다한 이야기들을 나눈다. 비록 올해에는 잘 해결되지 않았던 일들이 내년에는 잘 해결될 거다. 뉴스에서는 여자 엥커가 평소와는 다르게 들뜬 목소리 톤으로 제야의 종 타종 행사 상황을 보도한다. 오늘 하루만큼은 여자 엥커도 목소리를 깔지 않아도 된다. 올해도 다사다난했지만 결국은 해피엔딩이다. 우리와 다르게 수천만 년 전에 살았던 고대인들은 추운 겨울이 영원히 지속되진 않을까 두려웠을 거다. 몇백 번의 밤 전에도 엄청 추운 날들이 있었지만 몇십 번의 밤을 보내고 나니 따뜻해졌다. 하지만 이번에도 따뜻해질 거라고 어떻게 보장해? 확실히 하고 싶었을 거다..
서울에서 가장 높은 건물 롯데타워. 높은 건물은 어디에서나 눈에 띄어서 도시의 랜드마크가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롯데타워는 어디에서도 볼 수 있지만 가까이서 본 사람은 많지 않다. 지하철에 연결된 지하도를 통해서, 지하주차장의 엘리베이터를 통해서 건물에 들어가니 거대한 건물을 실제로 보기는 쉽지 않다. 롯데타워 뿐만이 아니라 다른 거대 구조물도 마찬가지다. 서울에 있는 대교, 고가도로, 높은 빌딩, 한강의 크기를 느낄 기회는 많지 않다. 언제나 차를 타고 거대 구조물을 지나치니까. 거대 구조물의 크기를 느끼기 위해서는 속도를 줄여야 한다. 마포대교를 걸어서 건너본 적이 있다. 전철이나 버스를 타고 지날 때는 1분 만에 건널 수 있었는데 걸어서 건너려니 15분이 넘게 걸렸다. 대교大橋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