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씁니다
만약에 본문
♬음악: Nils Frahm - My Friend the Forest
“질문. 다른 나라로 간다면 어디서 살고 싶나요?”
그녀가 물었다. “음, 독일?”, “헐, 내가 가고 싶었던 곳이었는데.” 그녀는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1년 정도 교환학생으로 독일에 갈 생각이었다고 고백했다. 독일? 왜? 그녀는 이유를 설명했다. 독일에는 유수한 제약회사가 많다고.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가 말하길, 만약 그녀가 독일이 마음에 든다면 독일 대학에 편입하고 그곳에 살아도 된다고 말했다고. 그때 나는 아찔함을 느꼈다.
순전히 우연이었다.
우리가 만난 것 말이다. 그 사실이 아찔했다. 그녀가 독일로 갔다면? 우리는 영원히 모르는 사이가 되었겠지. 통화가 끝나고 조건(if)이 많은 알고리즘들이 머릿속을 채웠다. 그리고 우리 사이를 비껴간 많은 장면을 상상하게 했다. 코로나가 생겼나요?(YES or NO), 이사를 갔나요?(YES or NO), 내가 다른 독서실을 다녔나요?(YES or NO), 그녀가 다른 아르바이트를 했나요? (YES or NO). ‘만약에 이랬다면, 만약에 저랬다면, 만약에, 만약에...’ 조건(if)들은 다양한 결과를 도출했다.
순전히 사실이었다.
매 순간 내 인생과 그녀의 인생 사이에 무한한 부피의 선택지가 존재했었다는 것 말이다. 그 선택지를 보니 그녀는 다른 남자를 만나고, 나는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었다. 그 아찔함. 내가 일하는 도서관에서 그녀와 내가 서로 스치는 장면도 있다. 우리가 같은 술집, 다른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는 장면도, 그녀가 아이를 유치원에 데리고 가다가 나와 스치는 장면도. 경우의 수는 무한했다. 그리고 새삼 깨달았다. 특별했다고 여긴 우리의 만남은 결국 우주의 무한한 부피 앞에서 우연한 사건일 뿐이라고. 때문에 나는 공허함과 허무함도 느꼈다.
그래서 어쨌냐고?
나는 운명과 신의 품으로 도망갔다. 신을 배제한 철학자가 누구였더라? 그래, 사르트르. 나는 사르트르같은 실존주의자가 아니었다. 나는 사랑의 시작에서 ‘반드시(‘우리는 반드시 만날 사이였어’)가 사라지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만약(if)’ 사건이 다르게 배치되었다면, 서로가 존재하는지도 모른 채 살았을 것이고, ‘만약(if)’ 사건이 다르게 배치되었다면, 언제든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었으니까. 그건 절대 안되지. 아무렴. 그래서 운명과 신의 존엄한 명령이 우리를 이어준 것이라고 해석하기로 마음먹었다.
우연의 기막힘이 고개를 들 때
나는 기막히고 희박한 확률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신이 조종한 것 같아’라는 둥, “사건들 때문에 우리가 만난 게 아니라 우리가 만나기 위해 사건이 벌어진 거야.” 라는 둥, 우연한 만남에 운명이라는 선을 잇고, 우연을 운명의 증거로 채택했다. 하늘을 보던 고대 사람들이 상상의 선으로 별들을 억지로 짝지어주듯, 손가락으로 저것이 전갈, 저것은 물병이라고 우기듯, 별이 별자리를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하듯이.
물론 냉소주의자들은 코웃음 치겠지.
그리고 ‘당신 바보지?’ 라는 뉘앙스로 이렇게 말할거다. “그럴듯하네, 그런데 그건 우연일 뿐이야.”, “친구야,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그들은 고깃덩어리에서 살과 뼈를 발라내듯 사랑에서 운명을 발라낼 것이다. 그들은 나의 생각을, 운명이나 신을, 타로와 사주를 믿지 않는다. 그들에게 낭만적인 운명론은 ‘사랑의 허영’ 혹은 ‘우연을 향한 오독’일 뿐이다. 나는 그들을 예상할 수 있다. 나는 그들을 잘 안다. 내가 그랬으니까.
by. 얼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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