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씁니다

부활 본문

얼치기

부활

우리도 씁니다 2021. 2. 15. 21:50
728x90

음악: On the Nature of Daylight

 

 

그림 하나를 상상하곤 한다.

해변에 큰 배가 정박해 있고 중년 둘과 어린 짐승 셋이 있는 그림. 그 그림을 보니 갑자기 진짜 이야기를 하고 싶다. 물론 난 그 시절을 모른다. 귀로 들은 이야기와 상상이 뒤섞여있다.

 

형이 있었다고 들었다.

열네살 위의 형. 나는 열네 걸음 앞선 남자를 보며 내 삶의 리허설을 볼 뻔했다. 하지만 그는 일찍 죽었다. 형은 나와 같은 부모의 세포에서 이 세상으로 밀려왔다가 다시 여백이 된 것이다. 파도처럼. 아버지와 친할머니는 못가겠다는 어머니를 두고 산에 올라갔다. 그리고 어린 겨드랑이에 꽂았던 손으로 어린 뼛가루와 익은 술 냄새를 뿌렸다. 모유색의 뼛가루는 분필가루가 되어 추억을 그렸을까? 산의 나무들은 나의 부모가 낳고 키운 슬픈 이야기를 먹었을까? 나야 알 턱이 없다. 엄마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개 같은’ 의사의 오진으로 형의 불행이 시작된 것 같다고, 확신한다고. 그렇다면 그때, 유골함을 든 나의 부모는 세상의 부당함에 대하여 억울함으로 중얼거렸을까? 그랬을 수도, 아닐 수도. 다시 말하지만, 나야 그 시절을 다 아는 건 아니니까.

 

내가 그에게 느끼는 감정은 강렬하지 않다.

마치 내 집의 전 주인처럼 희미하게 궁금할 뿐이다. 하지만 나의 부모에게 형은 뼈에 손금처럼 새겨진, 사라진 동거인이다. “아직도 생각나” 엄마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낙엽이 많은 산책로를 같이 걸었을 때였다. 불길한 잠을 자고있는 작은 몸을 들고 병원으로 뛰었다고 했다. 1m가 100m 같아서, 1초가 100초 같아서 자신의 다리를 원망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수 십년이 지나도 낙엽이 많을 때 쯤이면 매번 가슴이 아리기 시작한다고 고백했다. 동거인이 너무 짧게 살고 너무 오래 죽어있어서 남은 사람을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아빠는 형에 대해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엄마의 증언에 따르면 아빠는 이불만 뒤집어 쓰고 울기만 했었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형의 흔적을 보지 못했다. 부모님이 어디서 숨어서 보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아는 한, 우리 집에는 형의 사진도, 옷도 없다.

 

형의 죽음 앞과 뒤에 누나들이 태어났다.

그리고 형의 죽음 이후 십일 년이 지났다. 우리 가족의 삶? 순조로웠다고 들었다. 모두 건강했고 일과 집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어느 날, 태몽이 찾아왔다. 두 중년은 소년과 소녀처럼 웃었고 곧 익숙한 설레임을 느꼈다. 데자뷰처럼. 엄마는 다시 모래를 핥으러 오는 파도를 기다리는 자세로 때를 기다렸다. 출산은 삶의 재도전이며 부활의 시도였다. 노산을 앞둔 엄마는 부처를 버리고 교회를 선택했다. 기도했다. “주여, 삶의 재도전을 축복해주시길.” 그리고 1995년, 비슷하지만 다른 심장을 낳았다. 포돗빛의 내가, 젖과 똥이 흐르는 땅으로 툭, 나온 것이다.

 

유일한 신의 축복이었을까,

부모의 삶은 다시 움텄다. 그들의 삶에 꽃과 술, 그리고 산삼이 있었다. 꽃으로 가득한 집으로 친척들과 친구들이 모여들었고 술은 빠르게 사라졌다. 외할아버지는 산삼을 캐서 딸에게 주었다. 집도 있고, 자식 셋도 낳았으니 고생 끝났다고 말하면서. 나의 부모는 퇴근만 남은 것처럼 미소지었다.

 

하지만 당신들도 알다시피,

2년이 지나자 세상의 소문이 흉흉해졌다.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가 흔들리더니 대우, 기아, 진로, 해태 등 한국의 기업이 허물어진 것이다. 산소마스크를 쓴 한국이 IMF의 손을 잡았다. IMF는 대선 전에 유력한 후보 3명(이회창, 김대중, 이인제)에게 누가 대통령이 되든 약속(구조조정과 긴축정책)을 지키겠다는 각서를 받아냈다. 그때부터였다. 심장을 빚어낸 위대한 과학자들처럼, 자신만만한 했던 나의 부모가 힘을 잃었을 때가. 둘은 흉흉해진 세상 앞에서 움츠렸고 사나워졌다.

 

나는 그때 부모의 삶을 담은 그림을 볼 수 있다.

붓으로 그린 그 그림은 섬세하지 않은, 순간의 인상을 담은 그림인데, 그곳에 한 가족이 탔던 눅눅한 난파선 하나가 해변에서 조용히 썩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 중년 둘이 세 가지 소원을 다 써버린 것처럼 지쳐있고, 다시 그 옆에는 어른의 세상을 모르는 어린 짐승들이 해맑게 뛰어놀고 있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작은 무덤 하나가 옆에 있다.

 

 

 

 

by. 얼치기

 

 

얼치기

인스타 : @byhalves0009

 

우리도 씁니다.


인스타 @ussm._.nida


블로그 https://blog.naver.com/ussm2020

티스토리 https://wewritetoo.tistory.com 



 

 

'얼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양원  (0) 2021.03.04
기억, 이야기  (0) 2021.02.26
조 바이든  (0) 2021.02.05
바 [1월 : 술에 대하여]  (0) 2021.01.27
'사랑해'와 인플레이션  (0) 2021.01.18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