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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씁니다
"OO해." 내가 말했다. "뭐야?" 그녀가 당황했다. "새로 만든 단어야. ‘사랑해’보다 더 사랑한다는 뜻이야." "(웃음) 이상해." "그래?“ 사실 나 역시 ‘OO’이란 발음이 억지스럽다고 생각했다. 내가 먼저 물었나? 아마 그랬던 것 같다. 새벽의 통화에서였다. 나 말고 마지막 연애가 언제였냐는, 그런 식의 질문을 했다. 그녀는 내가 상처받을 것 같다는 말을 하며 주저했다. 그러다 혼자서만 간직하던 과거를 토해냈다. 내가 그녀에게 처음 말을 걸었을 땐 이미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나에게 이런 말을 해대겠지. 멍청한 놈. 그런 걸 왜 물어봐? 그러게 말이다. 결국 나는 가학적인 상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바로 내가 요즘 듣고 있는 '사랑해'가 그녀 입에서 음..
몇 달 됐다. 새로 글을 쓰지 못한 게. 최근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글들은 이전에 써둔 글이다. 그러다 드디어 글을 저장해둔 곳간이 텅 비었다. 혹시나 안 올린 글이 없나 몇 번을 확인해봐도 이미 햇빛에 색이 바래버린 글들 뿐이다. 나한테 필요한 것은 빛바랜 글이 아니다. 장독 속에서 숙성된 글이다. 전태웅은 글이 숙성되는 것이라고 했다. 시간에 맞아 된장이 익는 것처럼 넉넉한 시간을 두고 퇴고하고 들여다 봐야 향 좋은 글이 탄생한다. 내 경험상으로도 최소한 7일은 묵은 글이어야 남한테 보여줄 수 있을 정도로 익는다. 7일 정도 천천히 들여다 보면 없어야 할 문장, 엉뚱하게 끼워진 단어를 발견할 수 있다. 아쉽게도 이 글은 발효되지 못할 운명이다. 우씁니다 합평회 한 시간 전에 부리나케 노트북을 두드리며 ..
1. 나는 사칙연산을 포함한 단순 계산을 시작으로, 고등학교 수학 과정을 거치며 어떤 공식이나 결과(수학적 정리)에 대한 증명을 마주하며 수학에 매력을 느껴왔다. 처음에는 그 과정 역시 시험이라는 틀 안에서 외워야 할 글과 수식의 나열에 불과했을지 몰라도, 이해하면서부터는 비슷한 모든 문제들이 도미노처럼 내 앞에서 굴복하듯 무너지기 시작하며 희열과 자신감을 생산해냈다. 그리고 고등학교 수학을 벗어난 수학의 ‘역사’와 그 사이에 생겨난 문제들을 마주했고 수학의 또 다른 방향을 알 수 있었다. 답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예를 들면 2차 방정식에는 ‘근의 공식’이 존재하지만, 5차 이상의 방정식에서는 근을 찾는 공식이 없고, 이는 증명된 사실이다. 또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그렇다. 굉장히 간단한 ..
결혼생활은 세금 같았다고 한다. 기쁜 일 뒤에 오는 골칫덩어리였으니까. 행복은 딱 상상에서 멈췄다. 결혼‘생활’은 지금 가정이 결함 있는 인격체끼리 만나 이룬 것임을, 결혼생활에 재능이 없는 사람끼리 만난 것임을 깨닫게 해줬다고 한다. 그러다 딱 하나의 치명적인 사건으로 인해 그녀는 이 결혼생활이 ‘세금’이 아니라 ‘잘못 산 복권’ 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정떼기’ 경쟁에 돌입했다. 그리고 두 가지 선택지가 그녀 앞에 놓였다. 하나는 견디는 것. 다른 하나는 끝내는 것. 전자는 기혼, 후자는 이혼이었다. 그녀는 후자를 선택했다. 그녀는 바로 법원으로 돌진했고, 서류와 때려치우고 싶은 충동을 함께 움켜쥔 채 빠르게, 배짱 있게 절차를 돌파했다. 그리고 끝. 끝났다. 모든 것이 마무리되었다. 식장에서..
기록적인 폭염이란다. 겨우 5분 걸었을 뿐인데 땀이 주륵 흐르는 폭염이다. 마스크를 찢어버리고 싶어질 정도로. 따라서 빙수의 날씨다. 요즘은 우유빙수만 보이고 얼음빙수는 찾기 어려워졌지만 그래도 여름에는 얼음빙수를 먹어야 한다. 더우면 더울수록 얼음빙수가 좋다. 수분을 보충하기 위함도 있지만 비열의 문제가 가장 크다. 비열한 얼음빙수라는 뜻이 아니다. 비열은 온도를 높이는 데에 필요한 열 에너지를 말한다. 얼음은 비열이 크기 때문에 녹기 위해서 우유보다 더 많은 열 에너지를 빼앗는다. 그만큼 내 입은 더 시원해진다. 그러니 더운 날씨에 얼음빙수는 비열하기 보다는 친절하다. 우유빙수를 파는 매장은 유독 냉방이 세다. 빙수를 먹어서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라, 우유빙수를 먹으면 그렇게 시원해지지 않기 때문에 ..
그러니 말하자면 ‘우산 빌런’이다. 아, 좀 더 정확히는 ‘장(長)우산 빌런’이 맞겠다. 팔을 내리고 우산을, 그것도 장우산을 가로로 들고 다니는 이들. 물먹은 우산이 행여 ‘남에게 닿을까.’, ‘나에게 닿을까.’ 하고 일정한 거리를 두는데, 그 사이에서 굳이 또 우산을 가로로 들고 자신감 있게 팔을 휘젓는다. 올라가는 계단에서는 위험하기까지. 덕분에 탈 수 있던 열차 하나를 놓친 적도 있다. ‘왜 저럴까.’, 생기는 불가피한 의문. 이어진 가설, 혹시 자신의 영역을 넓히고 위협을 가하려는 무의식에서 비롯된 행동일까. 썩 좋지 않은 그들의 모습과 내 기억들로 구축된 확증편향일지라도, 영역 확장의 욕망이라는 기반을 가지고 접근하기 시작했다. 장우산의 사용 빈도와 나이는 비례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의 활동..
그들이 나타나겠다고 신고한 곳으로 가면 버스에서 내리기 전에 검은색 정강이 보호대를 꼭 찬다. 내가 첫 후임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떨어진 가을의 이파리들이 짓밟히고 으깨진 상태로 하수구를 틀어막았던 때, 그들이 나타날 강남터미널로 출동했다. 나에게는 두 번째 출동이었다. 터미널 어딘가에 버스를 주차했고 나와 동기는 내려서 선임들에게 정강이 보호대를 차는 교육을 받았다. 한 선임이 말했다. 과거에 장애인 시위자들의 자동 휠체어에 다리를 다친 대원이 있었기 때문에 정강이를 조심해야 한다고. 그리고 방패에 대한 교육도 받았다. 휠체어가 빠른 속도로 돌진할 땐 방패를 꼭 땅에 닿게 한 다음 45각도로 자신의 몸 쪽으로 기울이라는 것. 그 이유는 그들이 휠체어로 들이박을 경우 방패를 땅에 더 견고하게 ..
“내가 맛집 데려가 줄게!” 하연이 나를 당당히 데려간 곳은 맥도날드였다. “보통은 맥도날드를 맛집이라고 하지는 않아.” “맥도날드 맛있지 않아? 상하이 버거를 이길 수 있는 버거는 없지.” 하연이 싱긋 웃었다. 하연은 입을 조금 움직이거나 눈을 조금 감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편하게 하는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쉽게 웃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잘 웃었다. 날이 추워질 무렵 대학교 동아리에서 그녀를 만났다. 처음 만난 날에 하연은 검정색 가디건을 입고 있었다. 하연은 눈에서 태어난 것처럼 피부가 하얬다. 검정색 가디건은 그녀의 하얀 얼굴을 더 하얗게 만들었다. 따뜻한 카페에 들어가면 금방 얼굴이 발갛게 익었다. 검정색 커피가 빨대를 따라 작은 이빨을 넘어 하연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 “콜라 별로 안 ..
1. 그 동네에는 빵집이 있다, 모녀가 운영하는. 한 달에 두 번, 대형 마트의 휴무는 매출의 증가를 확연히 보여주었고, 얼마 안 있어 마트가 리뉴얼하며 매장에 빵집이 없어졌다. 매출의 증가를 확신한 딸은 엄마에게 차를 바꿔도 되겠다는 농담을 건넨다. 엄마는 무미건조하게 답한다. “근처에 빵집 하나 곧 생길걸” 그녀의 말대로 동네에 빵집에 두 개가 더 생겼다. 게다가 하나는 정류장 앞에. 2. “참 공부하기 좋은 세상이야.” 부모님을 포함해 어른들로부터 자주 듣던 말이다. 늘 뒤에는 ‘그러니까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지겹도록 듣는 대사 때문에, 앞선 말은 본론을 말하기 전 들려오는 헛기침 같은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지금은 ‘스터디 카페’를 나오면서 내 입으로 중얼거린다. 공부는 늘 어딘가에 짱박혀 하..
1. 그때 카페에서, 우리는 검은 소파에 앉아있었고 빛은 창문을 뚫고 들어와서 뺨의 솜털과 곰지락거리는 손가락, 그리고 손에 들린 컵을 비췄다. “그거 들었어?” 그녀는 나에게 최근에 일어난 범죄를 이야기해 줬다. 용의자는 아이의 엄마. 용의자의 DNA 검사. 99.9% 일치. DNA 검사를 반박하는 용의자. 용의자를 반박하는 과학수사. 그녀는 진지하고 흥미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는 유전학을 전공한 사람이었다. 2. 나는 생각했다. 과학수사? 맞아, 얘 집 10분 거리에 과학 수사대가 있었지. 그러자 어떤 이미지 하나가 툭 떠올랐는데, 그 이미지는 묘사할 수 있을 정도로 뚜렷했다. 무대가 과학 수사대였다. 시간은 깜깜한 밤, 인물은 우리 둘과 지나가는 남자들. 크고 작은 소품들도 떠올랐다. 검은색 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