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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겸

글이 안 써져어어

우리도 씁니다 2021. 8. 27.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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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됐다. 새로 글을 쓰지 못한 게. 최근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글들은 이전에 써둔 글이다. 그러다 드디어 글을 저장해둔 곳간이 텅 비었다. 혹시나 안 올린 글이 없나 몇 번을 확인해봐도 이미 햇빛에 색이 바래버린 글들 뿐이다.

나한테 필요한 것은 빛바랜 글이 아니다. 장독 속에서 숙성된 글이다. 전태웅은 글이 숙성되는 것이라고 했다. 시간에 맞아 된장이 익는 것처럼 넉넉한 시간을 두고 퇴고하고 들여다 봐야 향 좋은 글이 탄생한다. 내 경험상으로도 최소한 7일은 묵은 글이어야 남한테 보여줄 수 있을 정도로 익는다. 7일 정도 천천히 들여다 보면 없어야 할 문장, 엉뚱하게 끼워진 단어를 발견할 수 있다.

아쉽게도 이 글은 발효되지 못할 운명이다. 우씁니다 합평회 한 시간 전에 부리나케 노트북을 두드리며 쓰여진 이 글은 마지막 온점을 두드리는 순간 바로 세상에 공개될 거다. 말하자면 데워지자 마자 눈 안으로 들어가는 정크 글이랄까.

우씁니다를 처음 시작할 때는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노트북 위에 손을 올리면 ‘내가 이런 생각을 담고 있었구나’하고 놀랄 정도로 글은 쏟아졌다.

지금은 왜 이렇게 되었을까. 내 안에 담겨 있던 소재가 밑천을 드러냈나? 그렇다고 하기에는 이전에 쓴 글들이 대단한 문학도 아니고 학술적인 글은 더더욱 아니다. 그냥 내 사소한 일상들을 자유롭게 적은 글이다. 내 사소한 일상은 1년 내내 계속되고 있으니 밑천을 드러낼 일은 없다. 여유가 없다고? 나는 오늘도 텔레비전으로 시간을 보냈다. 글을 쓸 여유는 충분하다.

과대평가. 그것도 나에 대한 과대평가가 글이 나오는 구멍을 막은 것 같다. 허영심, 자만이라고도 표현할 만한 이 과대평가는 배수구를 막은 머리카락과 비슷하다. 한 올 씩 떨어진 머리카락이 어느새 배수구를 막고 물이 떨어지지 못하게 만든다. 나는 이것보다 더 멋들어진 글을 쓸 수 있다고! 이 때 생각은 글이 되지 못하고 고여 버린다.

머리카락은 수시로 청소해야 한다. 신경쓰지 않으면 금새 배수구를 막아버린다. 요즈음 신경을 쓰지 않았더니 배수구가 머리카락에 막혀 있었다. 오늘 드디어 배수구를 막고 있던 머리카락을 거두었다. 샴푸의 거품이 하얗게 끼어 있는 구역질 나는 머리카락을 휴지에 싸서 변기에 넣고 내려버렸다. 그러고 나니 이렇게, 아주 쉽게 글이 써진다. 그래. 나는 이렇게 별 거 없는 일상을 쓰는 거야. 사람들이 좋아요를 누르지만 읽지는 않을 글을.

나를 위해 글을 쓴다. 나는 특출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내 일상은 세상에 단 하나 뿐인 나의 일상이다. 그 아무도 나의 일상을 그대로 경험하지 못한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것. 그것만으로도 나는 소중해진다.

부지런하게, 부지런하게 머리카락을 거두어야 한다. 크지 않지만 소중한 나를 위해.

 

 

 

 

by. 김도겸

 

 

김도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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