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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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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대¹에 신병들이 도착했다. 훈련소 햇볕에 탄 피부가, 두피가 보일 정도로 짧은 머리가 눈에 띄었다. 그들은 잘생긴 건달들 같았다. 그때 마침 A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A는 스페인어를 전공한 엘리트였고 나의 먼 후임이자, 우리 소대²의 막내였다. A는 나를 보자 인사하고 송곳니를 보이며 웃었다. 나는 A에게 턱짓으로 신병들을 가리켰다. A의 표정이 굳었다. 2. 신병은 부대의 흥분과 노동력의 대명사다. 물론 ‘우리’의 신병일 때만. 내가 가리켰던 신병들은 우리 소대가 아닌, 다른 소대 소속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신병들이 오지만, 우리 소대에‘만’ 신병이 오지 않을거라는 소식을 들은 건 전날 밤이었다. A는 낙담했다. A는 최장기간 막내였다. 사실, 몇 달째 막내가 없다는, 이 기록적인 불행은 예견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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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카페 앞에서 해원이 손에 든 헌 책을 살펴보고 있다. 자신이 과거에 산 책인지 아닌지 생각 중이다. 옆에서 그녀의 엄마가 말한다. “엄마가 하나 사줄게.” “됐어요. 잘못하면 집에 책이 두 권 되잖아요.” 카페에서 나온 한 남자가 그 모습을 보더니 말을 건다. “그 책들, 돈 주고 싶은 만큼만 주시면 되는데·······.” 이어지는 어색한 대화. 그리고 남자가 다시 한 번 말한다. “책들, 진짜 돈 주고 싶은 만큼만 주시면 돼요.” 그러자 해원이 말한다. “그러면, 내가 너무 드러나잖아요.” 그 말을 들은 남자가 멋쩍은 듯 웃는다. 재밌는 대사였다.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말을 직접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돈이 특히 그렇다고 생각했다. ‘주고 싶은 만큼’, ‘줘야 할 것 같은 만큼’, 이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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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렇지만, 뭔가 될 거라는, 어떻게든 될 거라는 착각을 하는 것 같다.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말한다. “‘시험 때 되면 하겠지. 당연히 할 수밖에 없겠지. 고3 되면 잘 하고 있겠지. 내가 설마 그 학교도 못 들어가겠어?’ 이런 안일한 생각을 하면 안 돼. 불안해야 돼. 불안하지 않고 편안하다면 공부를 제대로 안 하는 걸지도 몰라.” 그럼에도 숙제를 안 해오는 아이들을 보면 답답할 때가 많다. 답이, 방법이 저렇게 있는데, 왜 그대로 안 하는 걸까. 그리고 귀가한 뒤 생각한다. ‘잠깐, 나도 그때 안 해놓고 무슨 소릴 하고 온 거야.’ 하긴 지금 이 동력은 후회에서 온 걸지도 모른다. 불안과 고통이 선명해지면 그제야 깨닫는다. 지금도 아니라고는 못 하겠다.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시간이 있을 때는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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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4년이 지났다는 거지? 훈련소에서 만난 게 17년도였으니까. 우리 둘 다 두피가 보일 정도로 짧은 머리였고 동갑이었지. 훈련소 식당에서 내가 이렇게 물었어. 영화 좋아하냐고. 너는 고개를 끄덕였어. 마침 심심한데 잘 됐다 싶었고 밥을 먹으면서 영화 얘기를 했지. 얘기가 잘 통했어. 그래서 나는 너의 수준을 가늠하기 위해 평론가 ‘이동진’을 아냐고 물었지. 너는 이렇게 대답했어. “GV에서 여러 번 봤죠” 알고 보니 너는 영화에 미친 사람이었어. 암막과 밤하늘, 두 종류의 천장밖에 없었던 영화광. 그날 이후로 4주의 훈련은 영화와 인문학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채워졌어. 그때를 생각하면, 이상하게도 어떤 포만감을 느꼈던 것 같아. 아, 그리고 수학 이야기도 했었지. 진짜 흥미로운 건 너의 전공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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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이 걱정되는 게 아니겠지. 대기업에 취업하지 못할까봐, 사무직으로 일하지 못할까봐 걱정하는 거겠지. 그도 그럴 게 제조업과 현장직이 존중받지 못하는 시대니까. 시장논리에 의해서 결정된 거니까 어쩔 수 없다고? 수요와 공급이 우연히 만나 결정된 노동의 가격을 존중의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 우연은 능력이 아니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하는 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 유리 한 장으로 갈리는 아래에서 고층 빌딩 안을 쳐다보면 유리가 빛을 반사할 뿐이다. 유리에는 다른 빌딩의 모습이 반사될 뿐 빌딩 안은 비치지 않는다. 그러나 철로 된 것처럼 보이던 유리도 결국은 유리다. 가까이에서 들여다 보면 그 안이 보인다. 에서 주인공 쇼코는 괜찮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에 실패한다. 또 면접을 실망스럽게 본 쇼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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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 앞자리가 ‘010’이 아닌 사람들이 아직도 많은가 봐.” 그녀가 말했다. “그럼 ‘투지폰’을 쓴다는 거 아니야? 안 불편한가?” 내가 반응했다. “불편해도 쓰는 거면, 왜 쓰는 거 같아?” 또래 친구들보다 늦게 핸드폰을 샀던 게 생각났다. 돌이켜보면 그 전까지 내가 불편한 것은 거의 없었다. 다만 연락이 안 될 때마다 부모님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이 불편했을 뿐.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젠 ‘없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메신저들이 누군가에겐 ‘가져본 적도 없는 것’일 수도 있다. “하긴, 본인은 불편하지 않을 수도 있겠네.” “그냥 쓰던 걸 계속 쓰고 싶다는 건가.” “그렇지. 일종의 관성처럼. 그리고 핸드폰 바꾸는 것보다 번호 바꾸는 게 더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해. 특히 나이 드신 분들이 좀 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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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어느 알코올 치료센터의 일화 하나. 어느 날 탕비실 선반에서 맥주잔이 발견됐다. 그러자 환자들은 조심스럽게 서로 어떤 맥주를 좋아했는지 이야기했다. 큰 잔에 담은 에일, 도수 높은 라거 등등. 환자들은 추억에 빠졌다. 따가운 탄산이 목을 간질이는 느낌, 에탄올이 위벽에 스르륵 흡수되는 느낌, 침울하고 나른했던 느낌. 그러자 그들 사이에서 불길한 징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0.2 중독은 뇌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그래서 환자들 사이에서 ‘치어스 Cheers’라고 장난치는 것도 위험하다. 깊게 남은 중독의 흔적은 작은 단서에도 꿈틀거리니까. 작은 단서에도 꿈틀거리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맥주잔처럼 이미지 하나가 위험하다. 내 눈에 스치는 간판, 게임, 기사 제목, 버스 옆면에 붙은 광고,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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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가 한국에서 유행하기 시작한지 1년이 지났다. 마스크를 쓴 모습은 익숙하고 마스크를 쓰지 않은 모습은 놀랍다. TV에 2019년에 촬영한 예능이 흘러나오면 길거리에 수많은 사람들이 마스크도 쓰지 않고 돌아다니고 있어서 깜짝 놀란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가 보려 하지 않았던 사회의 문제를 표면 위로 떠오르게 하고 눈에 보이게 했다. 다양성에 대한 공격,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집단의 이익을 위해 쉽게 무시해 버리는 태도가 표면 위로 떠오른 우리 사회의 문제다. 아는 사람이 얼마 전 유럽의 오스트리아에서 돌아왔다. 인구가 900만 명인 오스트리아에서는 매일 3000명의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자가 나오고 있다. 매일3000명당 1명 꼴로 감염되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나라는 인구가 5천만 명인데 매일 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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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XX 늦은 답장을 써보려한다. 이제서야. 그래보려 한다. 헤아려보니, 달을 넘기고도 보름 즈음이 더 지났다. 네 편지를 받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굳이 바빴다거나, 그래서 겨를이 없었거나 하는 핑계를 댈 생각은 없다.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그저 ‘답장을 쓸 수 없는 마음만이 가득 차 있는 시간을 보냈다.’ 라는 말 뿐이다.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질량을 품은 듯 무거운 펜은 편지지 위에 단 한 획조차 써 내리지 못하게 했다. 획이 더해질수록 펜의 무게보다 더한 중력이 내 마음을 짓누를까 두려웠던 것 같다. 겨우 막아놓은 댐이 무너지듯, 한 획 한 획에 굉음을 내며 무너질 슬픔이 두려웠다. 한번 터진 슬픔은 도저히 통제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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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 10분’ 대충 예상한 시간이다. 환승할 필요도 없고 날씨도 좋아 선택한 버스. 하지만 그 긴 시간 때문에 가져온 책도, 창밖도 보지 않는다. 자리가 생겨 앉자마자 유튜브를 꺼냈고 자연스럽게 알고리즘을 따라간다. 하긴, 차 안에서 책을 보다 어지러워 멀미가 났던 경험이 있다. 책은 이따 지하철을 타며 보기로 했다. 창밖, 처음 보는 비슷한 건물들의 연속일 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유익한 영상시청 시간을 만들기로 한다. 그러나 결국 이미 봤던 영상들에까지 손을 뻗는다. 2년 전에 개봉한 영화 의 하이라이트 액션 영상까지 클릭하게 되었다. 액션을 하는 주인공의 배경 속 조연들 몸짓까지 세세하게 신경을 썼는지, 힘을 숨기고 있던 주인공들의 모습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장르적으로 표현했는지를 평가할 생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