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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 개혁하기

우리도 씁니다 2021. 8. 31.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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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O해." 내가 말했다.

"뭐야?" 그녀가 당황했다.

"새로 만든 단어야. ‘사랑해’보다 더 사랑한다는 뜻이야."

"(웃음) 이상해."

"그래?“

사실 나 역시 ‘OO’이란 발음이 억지스럽다고 생각했다.

 

내가 먼저 물었나?

아마 그랬던 것 같다. 새벽의 통화에서였다. 나 말고 마지막 연애가 언제였냐는, 그런 식의 질문을 했다. 그녀는 내가 상처받을 것 같다는 말을 하며 주저했다. 그러다 혼자서만 간직하던 과거를 토해냈다. 내가 그녀에게 처음 말을 걸었을 땐 이미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나에게 이런 말을 해대겠지. 멍청한 놈. 그런 걸 왜 물어봐? 그러게 말이다. 결국 나는 가학적인 상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바로 내가 요즘 듣고 있는 '사랑해'가 그녀 입에서 음도, 음절도 복사되어 다른 사람의 귀에 들어가는 장면이었다. 그 장면이 달걀 속 병아리처럼 머릿속을 쪼아댔다. 가슴속이 메슥거렸다. ‘사랑해’는 나만 듣고 싶었으니까. 처음 그걸 들었을 땐 황송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랑해’를 듣는 게 즐겁고 달콤했다. 특히 그녀가 타고난, 다른 여자들이 부러워할 만한 목소리가 '사랑해'와 잘 어울렸다. 그런데 이 좋은 걸 나만 들은 게 아니라니. 불과 몇십 일 전에는 내 것이 아니었다니. 질투가 났다.

 

갑자기 '사랑해'가 낯설어졌다.

뭐랄까, 선물로 중고를 받은 느낌이랄까. 남이 쓰던 물건처럼 보였다. 물론 나도 알지. 사랑은 흐름이고 소리는 파동이라는 거. 그래서 소리는 만져지고 보이는 물건과 달라서 낡아질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리고 소리는 아주 쉽게 공유된다는 것도 잘 안다. ‘모나리자’를 보려면 긴 줄을 서야 하지만, 콘서트 스피커 앞에서 긴 줄을 설 필요는 없지 않은가? 오히려 소리는 다른 사람과 나누면 더 행복해진다. 하지만 일대일 연애에 있어서 '사랑해'는 보통의 다른 소리와 다르다. 오직 이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만 들을 수 있는, 무단 복제가 금지된 목울대의 떨림이다. 다시 말해, '사랑해'는 나의 배타적인 권리였다. 그런데 문제는 나의 결벽증이었다. 과거의 '사랑해'까지 내가 소유하고 싶고 내가 듣는 '사랑해'는 새것이면 좋겠다는 결벽증. 유치하지만 전형적이고 고전적인 질투였다. 또, 불가능한 바람이었고. 결국 나는 언니의 옷을 물려받은 동생이 느끼는 질투와 불쾌감으로 속이 쓰렸던 것이다. 더구나 나는 나 자신을 권리를 빼앗긴 비극적인 인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웃기지 않나? 뺏기지도 않았는데 상실감을 느끼다니.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유아적 퇴행? 자질구레한 것에 허우적대는 인간? 아무튼 그녀가 나를 미친놈으로 볼 게 분명했다.

 

사실 “사랑해”는 복제된 것도,

중고가 된 것도 아니었다. 똑같은 강물도, 똑같은 구름도 없듯이, 모든 사람들의 지문이 각각 고유하듯이 '사랑해'는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상황이 언제냐에 따라,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나이를 먹고 변했느냐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결국 나는 언어라는 놈이 가진 한계 때문에 내가 질투한 거라고 결론 내렸다. 한계? 무슨 한계? “사랑해”가 사랑을 표현할 때 쓸 수 있는 유일한 동사라는 현실 말이다.

(할 얘기가 더 많아져서 미안한데)

언어는 디자인이 똑같은 포장지라고 생각했다. 각각 다른 내용물을 넣어도 구별할 수 없게 만드는 그런 포장지. 동의하는가? 차들이 하나의 도로만 지나는 것처럼 고유한 의미들이 단어 하나에 수렴한다. 그래서 개별적인 의미들이 단어 하나에 묶인다. 누군가 "돌!"이라고 외치면 "돌"이 "돌을 가져오라"라는 의미일 수도 있고 혹은 "돌을 피하라"라는 의미일 수도 있지 않은가? '사랑해'도 마찬가지였다. 겉으로 들으면 나의 '사랑해'와 다른 사람들이 들었던 '사랑해'는 구별할 수 없다. 때문에 '사랑해'의 ‘사랑’이라는 알맹이가 나에게는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명사, 혹은 대량생산된 공산품, 혹은 다른 사람이 물려준 중고, 혹은 마구 뿌려진 지폐처럼 느껴질 수밖에, 다시 말해, 존재감이 사라질 수밖에 없다. 동의하는가? 동의한다고? 고맙다.

 

난 나만의 것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옷을 물려받아서 짜증이 난 동생이 자신의 옷을 가지려면 뭘 어쩌겠는가? 부모에게 "지긋지긋한 집구석" 운운하면서 새 옷을 사달라고 하거나, 옷을 리폼해야 한다. 나는 특별한 “사랑해”를 가지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특별해지려면 유일함이 필요했다. 유일해지기 위해선 새로움이 필요했다. New가 만들어낸 Only, 그리고 Too에 대한 Only의 승리. 그걸 위해 '사랑해'를 대체할 새로운 표현을 찾았다. "해랑사?" 뭔가 부족하다. 패쓰. "사랑해A-1?" 로봇 같네. 패쓰. "따랑해?" 모자라 보인다. 패쓰. 후보를 찾다가 그녀의 성과 나의 이름 맨 뒷글자를 붙여봤다. 흠, 어색한데 나쁘지 않았다.

 

늦은 저녁.

극장 문이 닫히듯 빛이 사라진다. 가끔 오토바이가 까만 정적을 깨뜨린다. 나는 혼자다. 기발한 몽상을 하다가 컴컴한 어둠에 누워있다. 나는 핸드폰에 대고 말한다. "OO해." 그녀는 웃으며 답한다. "뭐야 그게?" "새로 만든 단어야. ‘사랑해’보다 더 사랑한다는 뜻이야."

 

흠, 누가 말했더라?

가끔 인간은 중요한 고민을 하는 대신 헛짓거리에 더 정성을 쏟는다고, 그리고 그 시간 낭비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역사’라고 말했던 사람이? 그래, 내 역사가 그렇다. 나는 내 유전자를 되도록 널리 퍼뜨리는 것보다 특별한 ‘사랑해’를 듣는 것에 정성을 쏟았다. 또 다른 사람의 말도 기억난다. 젊었을 때는 역사를 진보의 직선 운동으로 여겼는데, 나이 들어보니 역사는 진보와 후퇴의 반복이었다고. 옳다. 전쟁과 평화, 빈곤과 번영 사이를 오가는 것, 그리고 살면서 약간의 성취와 실망을 맛보는 것, 결핌감을 해소하려다가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키는 것. 인생이, 역사가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며칠 동안 나는 개혁을 계속 밀어붙였었다. 그건 나의 야심이었다. 처음 ‘OO해’는 상투어의 덤불 속에서 독보적으로 빛났고, 유일하다는 자긍심이 담겨있었으며 단어의 부모인 나는 뿌듯함을 느꼈다. 어색함과 억지스러움? 계속 들으면 익숙해질 것 같아서 무시했다. 하지만 구관이 명관이라던가? 결국 얼마 못 가서 '사랑해'만한 게 없다는 생각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었다. 그녀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OO해"에서 제대로 된 "사랑"의 느낌을 받을 수 없었으니까. 내가 모르고 있었던 게 있었다. '사랑해'는 이미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우리 머리와 마음에 깊게 뿌리내린 어휘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사랑해”가 다시 등장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개혁은 흐지부지됐다. '사랑해'는 이미 사랑의 영역에서 왕이며 유일신이었고 갓태어난 애송이 "OO해"는 쭈뼛거리며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전통의 승리이자 개혁의 실패였고, 왕정의 복고이자 Too에 대한 Only의 패배였다. 

 

 

 

by. 얼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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