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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참참

우리도 씁니다 2021. 7. 18.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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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때 카페에서,

우리는 검은 소파에 앉아있었고 빛은 창문을 뚫고 들어와서 뺨의 솜털과 곰지락거리는 손가락, 그리고 손에 들린 컵을 비췄다. “그거 들었어?” 그녀는 나에게 최근에 일어난 범죄를 이야기해 줬다. 용의자는 아이의 엄마. 용의자의 DNA 검사. 99.9% 일치. DNA 검사를 반박하는 용의자. 용의자를 반박하는 과학수사. 그녀는 진지하고 흥미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는 유전학을 전공한 사람이었다.

 

2.

나는 생각했다.

과학수사? 맞아, 얘 집 10분 거리에 과학 수사대가 있었지. 그러자 어떤 이미지 하나가 툭 떠올랐는데, 그 이미지는 묘사할 수 있을 정도로 뚜렷했다. 무대가 과학 수사대였다. 시간은 깜깜한 밤, 인물은 우리 둘과 지나가는 남자들. 크고 작은 소품들도 떠올랐다. 검은색 패딩, 더럽게 쌓인 눈 그리고 커피색 눈동자. 그래, 기억났다. 그때 상황은 조금 심각했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이럴 거면 왜 만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혹시 그거 아는가? 장면은 기억나도 그 장면의 앞과 뒤가 기억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 사실 나는 그때 그 상황의 원인과 결말을 기억하지 못했다. 궁금했다. 어쩌다가 그랬지? 어떻게 마무리됐지? 누구였지, 먼저 상대의 마음을 긁어버린 사람이? 검은 소파에서 나는 좀 멍청한 말투로 이렇게 물었다. “우리 거기서 분위기 심각했었잖아, 근데 왜 그랬지?”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몰라.”

 

3.

이마에 힘을 주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흠... 생각, 나는 생각을 해야 했다. “뭐해?” 그녀가 물었다. 나는 아무렇게나 자란 수염을 만지며 대답했다. “흠, 기억하는 중이야... 왜 싸웠는지”. 나는 남자애 하나, 여자애 하나가 나오는 이인극을 보는 관객처럼 온통, 과거의 그 이미지만 신경 썼다. 하지만 기억은 반쯤 기억나는 가요처럼 아슬아슬하게 도망갔고 내 얼굴만 애매하게 일그러졌다. 사슴을 놓친 사냥꾼의 얼굴처럼. 그래서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왜 싸웠지? 누구였지? 기억나?”

 

“참참참!”

 

응?

흰 손가락이 내 미간 쪽으로 왔다. 그리고 딱밤. “아!” 그리고 다시 “참참참!” 나는 턱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하지만 손가락 방향도 오른쪽. 그래서 딱밤. “아! 안 해.” “참참참!” 나는 다시 오른쪽으로 턱을 돌렸다. 하지만 또 손가락 방향과 같았다. “잠깐만” 나는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딱밤. 그제서야 나는 그녀의 눈을 쳐다봤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라는 눈빛으로. 커피색 눈동자도 나를 봤다. “생각하지 마.”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다시 외쳤다. “참참참!”

 

4.

그때 카페에서,

기억이, 나를 사로잡을뻔한 기억이 도망갔다. 이미지 속 무대의 조명이 꺼져버렸고, 이미지 속에 존재하던 우리 둘은 사라졌다. 과학 수사대도 사라졌다. 회상은 환상처럼 사라졌다. 그제야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보였다. 과거에서 현재로 돌아온 것이다.

 

5.

그때 카페에서,

나는 불화의 원인을 파헤쳐서 미묘한 증오에 빠질 뻔했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무언가를 덧씌울 뻔했다. 현재의 기쁨이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뻔했다. 그런데 잠깐, 다시 궁금해진다. 내 머리통에서 나오려다가 사라진 그 기억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지금 나는 소금을 흘린 부엌 식탁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아직도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도 알 수 없다. 그 사건이 중요한 역사이고, 논쟁할 가치가 있었다면 내가 기억하고 있었으려나? 뭐, 아무튼 이제 중요하지 않다. 그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뿐이다.

 

 

p.s

“산은 산으로 보고, 물은 물로 봐야지!”

방송에서 한 스님은 이렇게 말하면서 ‘있는 그대로 보라’고 말했다. 친구를 만나면 친구를 만나야지, 왜 친구를 향한 평가, 선입견, 고정관념으로 덕지덕지 붙은 이미지의 합을 보고 있냐고 혼냈다. 그것은 마치 친구를 만나는 게 아니라 나의 마음을 만나는 것이고, ‘진짜’ 친구와 대화하는 게 아니라 나의 마음과 대화하는 것이며 ‘현재’의 친구가 아니라 과거의 친구를 보는 거라고 소리쳤다. 죽비로 탁! 소리를 내면서 깨어나라고 말했다. ‘진짜’를 보지 않으면 괴로운 건 본인이라고 소리쳤다. 나는 그 스님이 땡중인지 아닌지 궁금해하다가 말았는데, 훗날 우연히 책을 읽다가 실제로 ‘있는 그대로 보기’가 불교의 핵심이라는 걸 알았다. ‘있는 그대로 보기’. 그것은 한자로 ‘진여(眞如)’였고 산스크리트어(고대어)로는 ‘타타타(तथाता, tathātā)’였다. 타타타!






by. 얼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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