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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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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던 어느 날, 뉴스에서 우리나라 인구가 5천만이라는 말을 흘러나왔다. 틀렸다. 사회시간에 분명 4천8백만이라고 했다. 아빠에게 물었다. 금방 2백만이 늘어난 것이냐고. 아빠는 ‘둘다 5천만이야.’라고 대답했다. 그 말투는 퉁명스럽거나, 냉소적이진 않았고 따뜻한 뉘앙스에 가까웠지만, 의문이 해결될 정도의 정보를 담고있지는 않았다. 4천 8백만이 어떻게 5천과 같지. 어른들의 숫자에선 2백만 정도는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것인가. 작은 수는 아무 의미 없는 것인가. 그 당시에는 다른 감정이 없는 ‘궁금함’뿐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영화를 보다 낯선 단어에 귀가 닿았다. 타짜2에서 주인공 대길이가 일명 ‘탄’을 맞는 장면이었다. 대길이는 판에서 진 댓가로 9억9천8백40만원을 물게 되었다. 귀를 끈 단어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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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변호사가 담당한 남자는 의도적으로 피해자를 살해하고 유기한 혐의를 갖고 있다. 변호사와 검사, 그리고 판사는 재판 전에 모여 진행과 결론을 의논한다. 검사와 판사는 최고 형벌로 결론짓기를 원한다. 재판 막바지에 갑자기 자신의 혐의를 전면 부인하는 등 피의자의 비일관적인 행동으로 인해 변호사도 이제는 그것이 불가피한 것을 안다. 게다가 ‘법조계’라는 한 배를 탔기에 더 이상 밀어붙이는 것도 자신에게 좋지 않다. 이젠 감정을 담아 피의자를 위로하고, 스스로 최선을 다했다고 되뇌이는 게 최선이다. 재판이 끝났다. 변호사는 피의자의 자백을 상기한다. 앞에 놓인 시체를 보며, 그는 뺨에 묻은 피를 손등으로 닦았다고 한다. 변호사가 법정을 나온다. 해가 지고 있다. 붉은 노을빛이 그의 뺨에 닿는다. 그는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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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0.8.26.) 흑인 대통령이 딸과 팔짱을 끼고 백악관 잔디를 걸을 때, 공화당원 백인은 인지부조화에 걸렸을지 몰라도, 동아시아 사람인 나는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끝난 줄 알았다. 내가 순진했지. 2. 조지 플로이드 사건에 이어 블레이크 사건이 터졌다. 경찰은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고, 대통령의 아들이란 놈은 그의 전과로 물타기를 시도했고 민주당은 부글거리고 있다. 이와 비슷한 일이 다시 일어날 거라고 생각한다. 두 인종은 이미 지독하게 얽혔다. 노예선을 타고 강간과 구타를 당해 온 조상 밑에서 태어난 흑인들, 총기 규제에 대해 어깨를 으쓱거리고 전통을 들먹이는 보수파 상원 의원과 제도권의 승자들, 쓰레기 같은 교육을 받고 갱스터가 되어 마리화나와 권총을 들고 다니는 흑인들, 반항하는 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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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을 너무 많이 넣었나 보다. 머리가 띵하고 세상이 돈다. 그릇을 물에 담가 두고 소파 위로 떨어진다. 30평 집 안에서 고요가 팽창한다. 기분 좋은 고요의 무게에 눌려 소파 깊숙이 파묻힌다. 눈을 뜨니 엄마가 현관문 앞에 서 있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면서 나를 발견했나 보다. 고개를 젖혀서 주황색 햇빛에 익은 눈으로 이마 뒤를 살핀다. 해가 지고 있다. 해는 아파트에 가려졌지만 여전히 벌떡이고 있었다. 나는 벌떡이는 해의 박동을 느낄 수 있었다. 꿈틀거리는 해와 꿈틀거리는 조직의 횡단면. 소의 간이 반으로 갈라졌다. 갈라진 조직은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는 것 같다. 송골송골 맺힌 피가 점점 커지다가 뭉쳐지고 이내 주륵 흐른다. 선홍빛 단면 위로 피가 줄기를 이루며 흘러내린다. 울퉁불퉁한 연회색 시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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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lue room- chet baker "쳇 베이커가" 친구가 입을 연다. “뭣 땜에 인생이 꼬인 줄 알아?" 나는 고개를 젓는다. "약. 약쟁이들은 멈춰야 할 때를 모르잖아.“ 아홉시 오십분. 첫 잔은 볼 안쪽과 위 속을 지져댄다. 지금은 세상의 물기가 말라서 맑아진 겨울, 잔인하게 추웠고 하늘은 빛을 벗겨냈으며 도시는 어둠으로 목욕 중. 검은 인조 장갑을 옆에 두고 우리는 홀짝인다. 와드득 깨물어 먹고 두툼한 것을 베어서 씹는다. 술을 비우고 반항기로 가득 찬다. 친구는 음악을 안다. 존 콜트레인이, 토니 버넷이, 마일즈 데이비스가, 마이클 잭슨이, 존 메이어가 얼마나 위대한지 떠든다. 왜 양희은이 우리나라에서 보물 같은 가수인지, 왜 백예린이 위대한 가수가 될 것인지 말해준다. 나는 그가 앨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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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의 최신작을 보았다. 라는 제목의 영화인데, 늘 그래왔듯, 극적인 사건이 없을뿐더러 형식적인 변화도 두드러지지 않았다. (2011)이나 (2014)의 경우 형식적인 변화가 명확했고, (2010)는 네 편의 단편작들을 모아놓은 것이기에 그것만으로도 큰 변화이자 일종의 사건이었다. 을 기점으로 그의 영화는 점점 소설보다는 시적인 형식을 띠기 시작했고, 이번에도 그러한 형식적인 부분이 존재했지만, 그게 다인 것처럼 보인다. 물론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서는 여전히(작품성적인 측면이 아닌 존재감의 측면에서) 독보적인 형태였다. 그러나 2011년 이후 늘 그런 형식적인 모습에서만 흥미로운 것은 아니었다. (2017)는 누가 보아도 각본가이자 감독 자신의 상황임을 보여주는 내용을, 노골적으로 대사까지 사용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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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무경찰로 복무하던 시절, 소속된 경찰서의 관할구역을 방범·순찰하는 게 담당 임무 중 하나였다. 서너 명이 한 조를 이뤄 그 날 해당하는 일대를 조의 수만큼 나눠 순찰한다. 배정받는 곳들의 명칭은 ~초교(初校), ~사거리, ~역, ~소방서, ~파출소 등이다. 그런데 그중 눈에 띄는 곳이 하나 있었고, ‘~마트’가 바로 그것이었다.(사실 마트라기보다는 슈퍼에 더 가까웠지만.) 2. 내가 지금 사는 곳을 관할하는 경찰서 역시 존재하고, (지금은 해체됐지만)그곳에 소속된 의무경찰들이 타고 이동하는 경찰버스를 전역 후 가끔 볼 수 있었다. 집 근처에서 방범·순찰을 하는 그들의 모습을 직접 마주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어느 날 한 번은 우리와 가까이 사는 이모네 집 근처를 의무경찰들이 순찰하면 어떨까 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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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폰을 두고 나왔다. 걸음을 멈추고 감은 두 눈 앞엔, 책상 오른편 이어폰의 자리가 또렷이 그려진다. 다시 되돌아가기도, 무시하고 가기도 애매한 거리. 다이소에 걸린 이어폰 위에 5천원이라는 가격표가 붙어있다. 5천원이면 하루종일 귀가 허전할 것을 면할 값으로 나쁘지 않다는 생각으로 한참을 들여다보다, 책상위에서 모처럼 만의 휴무를 누릴 놈의 금액이 이번달에 빠져나간 돈이란 생각이 들어 시선과 마음을 한번에 접었다. 덕분에 오늘 내 휴대폰은 작은 무성영화관이 되었다. 소리없는 영상들을 상영해야했으니까. 평소처럼 sns앱을 켠다. 오래 지나지 않아, 휴대폰을 바라보는 스스로에게 생경한 기분을 느꼈다. 무언가 어제와 달랐다. 어제까진 모든 신경이 휴대폰에 집중되어, 바깥 세상이 어떠했는지는 관심을 가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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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를 남발하면 나중에 의미가 닳을 것 같아.” 내가 말했다. 나는 어두운 방의 침대에 누워있었다. 다리를 뻗어 개어놓은 이불 위에 발을 걸치고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고 책상 위 스탠드 하나만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그녀가 대답했다. “아끼면 똥 돼.” 11월. 우리 사이를 여기까지 끌고왔던 ‘좋아해’를 ‘사랑해’가 밀어냈다. ‘사랑해’는 강했다. ‘사랑해’가 한 번 들어오자 ‘좋아해’는 역사의 반동주의자처럼 거슬렸고 눈치를 받았다. 그래서 어느 순간 ‘좋아해’는 ‘사랑하지 않아’라는 억울한 의미를 입고 짐을 싼 채 쓸쓸히 우리의 대화 밖으로 쫓겨났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정권이 끝나고 귀양을 가는 정치인처럼. 11월, 나와 그녀는 ‘사랑해’라는 말을 자주하기 시작했다. 옛 경제 교과서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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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진 백열등에서 생각한 는 밝을 것 같았는데 팡샤오샤오(주동우)와 린젠칭(정백연)은 꿈을 가지고 베이징으로 상경한다. 꿈을 이루기 위해 가난 하지만 행복한 날들을 보낸다. 영화는 팡샤오샤오와 린젠칭이 우연히 만난 현재 시점의 이야기를 번갈아 보여주며 진행된다. 이 영화의 특색은 빛이다. 빛의 양이 부족해 방 안에 그림자를 드리우던 백열등과 침침한 형광 등이 이 영화의 분위기를 주도한다. 지금의 LED와는 다른 온도의 빛 덕분에 관객은 쉽게 그 시대 로 갈 수 있다. 두 주인공이 밝은 미래를 꿈꾸는 모습은 LED를 기약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하지만 두 주인공을 기다리던 현재의 빛은 LED가 아니라 흑백이다.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린젠칭의 하숙집을 하이 앵글로 보여준 장면 또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