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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씁니다
1. 그것은 2020에 찍힌 쉼표였다. 쉼표 너머에 풍경이 보인다. 가해자가 환자인 풍경. 마스크가 x의 1제곱처럼 새삼스럽지 않은 풍경. 지하철에서 동시에 메아리치는 재난문자로 지역주민인 걸 알게 되는 풍경. 유치원 아이들이 마스크를 코에 꾹 누르는 기술을 완벽하게 연마하는 풍경. 대학교 책상 서랍에 거미줄이 쳐지고 청춘이 생략되는 풍경. 깔끔한 지옥이 된 상가의 풍경. 사람들이 사람들을 주춤거리게 하는 풍경. 찝찝함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풍경. 나가고 싶다는 공동체의 처절한 욕구와 거리두기 정책이 대립하는 풍경. 경제와 방역이 대립하는 풍경. 양성과 음성이라는 이진법이 팽팽하게 긴장된 줄을 선 사람들의 운명을 가르는 풍경. 이런 풍경이 계속되는 원인은 명확했다. 백신의 부재, 백신의 부재, 백신의 ..
"OO해." 내가 말했다. "뭐야?" 그녀가 당황했다. "새로 만든 단어야. ‘사랑해’보다 더 사랑한다는 뜻이야." "(웃음) 이상해." "그래?“ 사실 나 역시 ‘OO’이란 발음이 억지스럽다고 생각했다. 내가 먼저 물었나? 아마 그랬던 것 같다. 새벽의 통화에서였다. 나 말고 마지막 연애가 언제였냐는, 그런 식의 질문을 했다. 그녀는 내가 상처받을 것 같다는 말을 하며 주저했다. 그러다 혼자서만 간직하던 과거를 토해냈다. 내가 그녀에게 처음 말을 걸었을 땐 이미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나에게 이런 말을 해대겠지. 멍청한 놈. 그런 걸 왜 물어봐? 그러게 말이다. 결국 나는 가학적인 상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바로 내가 요즘 듣고 있는 '사랑해'가 그녀 입에서 음..
1. 나는 사칙연산을 포함한 단순 계산을 시작으로, 고등학교 수학 과정을 거치며 어떤 공식이나 결과(수학적 정리)에 대한 증명을 마주하며 수학에 매력을 느껴왔다. 처음에는 그 과정 역시 시험이라는 틀 안에서 외워야 할 글과 수식의 나열에 불과했을지 몰라도, 이해하면서부터는 비슷한 모든 문제들이 도미노처럼 내 앞에서 굴복하듯 무너지기 시작하며 희열과 자신감을 생산해냈다. 그리고 고등학교 수학을 벗어난 수학의 ‘역사’와 그 사이에 생겨난 문제들을 마주했고 수학의 또 다른 방향을 알 수 있었다. 답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예를 들면 2차 방정식에는 ‘근의 공식’이 존재하지만, 5차 이상의 방정식에서는 근을 찾는 공식이 없고, 이는 증명된 사실이다. 또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그렇다. 굉장히 간단한 ..
결혼생활은 세금 같았다고 한다. 기쁜 일 뒤에 오는 골칫덩어리였으니까. 행복은 딱 상상에서 멈췄다. 결혼‘생활’은 지금 가정이 결함 있는 인격체끼리 만나 이룬 것임을, 결혼생활에 재능이 없는 사람끼리 만난 것임을 깨닫게 해줬다고 한다. 그러다 딱 하나의 치명적인 사건으로 인해 그녀는 이 결혼생활이 ‘세금’이 아니라 ‘잘못 산 복권’ 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정떼기’ 경쟁에 돌입했다. 그리고 두 가지 선택지가 그녀 앞에 놓였다. 하나는 견디는 것. 다른 하나는 끝내는 것. 전자는 기혼, 후자는 이혼이었다. 그녀는 후자를 선택했다. 그녀는 바로 법원으로 돌진했고, 서류와 때려치우고 싶은 충동을 함께 움켜쥔 채 빠르게, 배짱 있게 절차를 돌파했다. 그리고 끝. 끝났다. 모든 것이 마무리되었다. 식장에서..
1. 그때 카페에서, 우리는 검은 소파에 앉아있었고 빛은 창문을 뚫고 들어와서 뺨의 솜털과 곰지락거리는 손가락, 그리고 손에 들린 컵을 비췄다. “그거 들었어?” 그녀는 나에게 최근에 일어난 범죄를 이야기해 줬다. 용의자는 아이의 엄마. 용의자의 DNA 검사. 99.9% 일치. DNA 검사를 반박하는 용의자. 용의자를 반박하는 과학수사. 그녀는 진지하고 흥미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는 유전학을 전공한 사람이었다. 2. 나는 생각했다. 과학수사? 맞아, 얘 집 10분 거리에 과학 수사대가 있었지. 그러자 어떤 이미지 하나가 툭 떠올랐는데, 그 이미지는 묘사할 수 있을 정도로 뚜렷했다. 무대가 과학 수사대였다. 시간은 깜깜한 밤, 인물은 우리 둘과 지나가는 남자들. 크고 작은 소품들도 떠올랐다. 검은색 패..
저 멀리 있을 땐 겨우 얕은 일렁임 따위였는데, 뭍에 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고있으면 저것은 모래사장의 무언가를 닦아내는 것인지, 되려 모래로 더럽혀 지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파도가 거셀수록 바다와 모래의 경계는 두텁게 혼탁해진다. 이것은 경계의 당연한 속성이다. 펜 촉에 힘을 주어 선을 그을 수록 그 흔적은 깊게 남는다. 종이를 가로지르는 횡축(橫軸)의 짙은 선은 공간을 분리한다. 지평선은 땅과 하늘을 분리한다. 경계는 구별짓기의 결과이며 분리의 시작이다. 명확함은 모호함 보다 인기있다. 미덕으로 여겨지기도한다. 이도저도 아닌 미적지근한 커피는 팔리지도, 메뉴판에 적히지도 않는다. 부먹찍먹만큼의 논란을 야기하진 않겠지만, 은밀한 취향을 고백하자면 한참 식은 따뜻한 커피와, 얼음이 다녹아 컵..
형은 원래 아팠던 아이였다고 한다. 어머니는 자신이 헌신했던 아이, 그 아이와 맞이한 새벽들, 먹였던 음식들, 모두 끌어들여 말한다.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남편, 그러니까 나의 아버지는 형의 장례 이후에 어머니에게 고생했다고, 자신은 그동안 그 아이에게 잘 해주지 못했다고 말을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의 말을 듣고 가증스러움을 느꼈다.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냐, 있을 때 진즉에 잘 했어야지, 이 사람아.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통곡은 짜증 나고 쓸데없는 짓이었다. 집이 다 타버려서야 울리는 화재경보기처럼.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당시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더 그 아이에게 헌신했고, 아버지가 채워주지 못한 보살핌을 자신이 채웠다고 생각했더랬다. 자신은 최선을 다했다고, 이만하면..
바람이 분다. 이렇다 할 방법없이 바람을 맞는다. 주로 무해하고 때론 기분이 좋기도 하니 별 말 없이 넘어가지만, 그렇다고 갑작스레 부는 바람을 맨몸으로 막아낼 방법이 뚜렷한 것도 아니다. 큰 저항 없이 바람은 우리를 스치고, 우리는 바람을 겪어낸다. 시간은 이런 바람 같다. 아무 저항감 없이 스쳐가는 바람도 수많은 겹을 덧대어 돌마저 깎는다. 의식해야 겨우 느낄 수 있는 시간의 흐름도, 나를 스치며 어제의 기억을 깎아낸다. 돌이 풍화에 깎이듯, 우리의 마음은 시간이 깎는다. ‘시간이 멈춘 듯’ 고통스러운 나날들이 있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시간이라는 약은 확인되지 않은 길거리 장수에게 산 것인지, 잘 듣지 않는 것 같다. 어떤 스님이 준 답이었나. ‘시간은 약이지만,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에겐 그 시간..
이런 얘기는 좀 쓸쓸하지만 해볼까? 너를 만나기 전 이야기야. 집에 들어가니까 심상치 않더군. 내가 보이자 식탁에서 옹기종기 모여있던 누나와 이모, 그리고 엄마가 갑자기 어수선해졌어. 나는 물을 마시고 내 방에 들어가 방문을 닫았지. 똑똑똑. “야, 나와봐.” 누나가 노크했어. 나는 결국 부엌에서, 그러니까, 어떤 상황인지를 알게됐지. 음, 엄마가 병에 걸렸다는 얘기였어. “별거 아니야.” 이모가 별것 아닌 척 말하더군. 기가 막혔지. 이런 일이 우리 가족에게도 생기다니. 나는 방에 들어와서 다리가 풀려버렸어. 대학 병원에 갔어. 침대는 바퀴달린 침대로, 밥은 죽으로 바꼈어. 병실을 나가서 중앙홀로 가면 자판기가 있고 긴 의자와 환자들이 많아. 병원이라는 사실만 빼면, 입고 있는 옷이 환자복이라는 사실만..
늘 그렇지만, 뭔가 될 거라는, 어떻게든 될 거라는 착각을 하는 것 같다.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말한다. “‘시험 때 되면 하겠지. 당연히 할 수밖에 없겠지. 고3 되면 잘 하고 있겠지. 내가 설마 그 학교도 못 들어가겠어?’ 이런 안일한 생각을 하면 안 돼. 불안해야 돼. 불안하지 않고 편안하다면 공부를 제대로 안 하는 걸지도 몰라.” 그럼에도 숙제를 안 해오는 아이들을 보면 답답할 때가 많다. 답이, 방법이 저렇게 있는데, 왜 그대로 안 하는 걸까. 그리고 귀가한 뒤 생각한다. ‘잠깐, 나도 그때 안 해놓고 무슨 소릴 하고 온 거야.’ 하긴 지금 이 동력은 후회에서 온 걸지도 모른다. 불안과 고통이 선명해지면 그제야 깨닫는다. 지금도 아니라고는 못 하겠다.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시간이 있을 때는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