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씁니다
Vertigo 본문
1.
의무경찰로 복무하던 시절, 소속된 경찰서의 관할구역을 방범·순찰하는 게 담당 임무 중 하나였다. 서너 명이 한 조를 이뤄 그 날 해당하는 일대를 조의 수만큼 나눠 순찰한다. 배정받는 곳들의 명칭은 ~초교(初校), ~사거리, ~역, ~소방서, ~파출소 등이다. 그런데 그중 눈에 띄는 곳이 하나 있었고, ‘~마트’가 바로 그것이었다.(사실 마트라기보다는 슈퍼에 더 가까웠지만.)
2.
내가 지금 사는 곳을 관할하는 경찰서 역시 존재하고, (지금은 해체됐지만)그곳에 소속된 의무경찰들이 타고 이동하는 경찰버스를 전역 후 가끔 볼 수 있었다. 집 근처에서 방범·순찰을 하는 그들의 모습을 직접 마주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어느 날 한 번은 우리와 가까이 사는 이모네 집 근처를 의무경찰들이 순찰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다.
지금은 집에서 취미 생활도 하며 비교적 편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모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동네에서 슈퍼를 운영하고 있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던 그 슈퍼는 늘 그 자리에 있는, 일종의 자연과 같은 당연한 ‘풍경’이었다. 이모네가 이사 가고, 근처를 지나다 부동산으로 바뀐 어색한 모습을 보며 새삼 30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슈퍼가 놀랍게 다가왔다.
의무경찰 또는 경찰들이 순찰하는 구역 중 하나가 이모네 슈퍼 근처라면 어땠을까. 몇 년 전 ‘형광 점퍼’를 입고 ‘빨간 불봉’을 쥐고 걸었던 장소의 명칭과 같이, ‘~슈퍼’ 또는 ‘~슈퍼 근처’가 서류상 그 장소의 이름이었을지도 모른다. 30년 가까운 세월은 그곳을 빼놓을 수 없는 요소로 만들어냈을 것이고, 그 시간에서 비롯된 관성을 가진 존재이기에 ‘~대교’나 ‘~백화점’처럼 앞으로 적어도 몇 년은 더 그 자리를 지킬 것이라는 누군가의 판단으로 고유명사화됐을 것이다.
3.
우리는 ‘꾸준히’나 ‘성실히’가 그간 겪어온 몇몇 아쉬움에 대한 답인 것을 알면서도 이런저런 핑계와 함께 외면한다. 그러면서도 짧은 시간 안에 자신의 특징이 존재감을 갖길 원하고, 익숙한 풍경이 되어 언젠간 사라지더라도 많은 이들의 기억에 남길 바란다.
물론 그 과정은 ‘즐기기’보다는 ‘버티기’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리고 단순히 버티는 것은 앞서 말한 성실함에 부합하지 않을 것이다. 군대와 같이 일정한 시간이 정해진 곳에서는 그저 버티는 것이 성과가 되고 권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 버티는 것은 ‘줄어가는 시간’을 보는 것이 아니라, ‘쌓여가는 시간’을 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버티며 시간만 쌓는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버틴다는 명목으로 시작된 무언가는 또 하나의 관성이 되어 어느 순간 목적의식을 잃고 후회라는 결과를 남기기도 한다. 그래서 버티라는 말이 갈수록 쉽게 안 나오는 이유가 있다면, 아마 그 과정이 유의미한 자취로 남기 위해선 불가피한 ‘현기증’이 동반된다는 사실을 언젠가부터 어렴풋이 느끼고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30년’과 같이 듣기만 해서는 감도 잡히지 않는 그 시간을 유의미하게 쌓아가며 버틸 수 있을까.
by. 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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