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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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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침 못 보던 2인용 유아 자전거 하나가 아파트 복도 한 켠을 차지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며칠 전 밖에서 들리는 이사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깼던 것 같다. 자전거는 이삿짐들 중 하나일 터였다. 엘리베이터 근처에 놓인 그 자전거는 나를 포함한 같은 층 주민들의 통행을 방해할 만큼 크거나 존재감을 표출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복도라는 공용 공간에 개인의 물건을 둔다는 것이 그리 바람직해 보지지 않는 것이 사실이었다. 물론 피치 못 할 사정이 있을 수도 있고, 말한 것처럼 통행에 방해가 되지 않기에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는 게 더 나을 수 있다.(가연성 물질이 아니기에 법적인 접근이 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인정한다. 그러나 도난방지도 안 한 채로 자전거를 세워 둔다는 점이 적잖이 신경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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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성실하다.’ 생각이 들었다. 소일거리를 하며 시간에 쫓기지 않는 하루를 보냈던 비 내리는 날, 문득 든 생각이다. 비는 내리는 양에 맞는 소리를 낸다. 소심하게 자신에게 걸맞은 소리를 못 내지도, 위상을 드러내려는 듯한 과장을 하지도 않는다. 제 분수를 지키며, 자기의 소리를 내는 것들은 성실한 것들이다. 창을 열고 그 소리를 직접 들으며 내리는 양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귀를 기울이고 창밖에서부터 들리는 그 소리를 듣는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며 든 여러 단상들이다. 1. 비와의 대조 우리는 보통 앞으로 나아간다. ‘나 갈게!’라 말하며 굳이 방향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앞으로’를 전제한다. 혹 뒤로 가게 되면, 그런 예외 상황이 생겼을 때가 되어야, 방향을 이야기한다. 잠시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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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였다. 올해 장마는 특히 길었다고 한다. 게다가 기억나는 태풍의 이름만 세 개 정도이니 단순히 긴 장마가 아니었다. 그리고 하필 그 시기에 촬영이 있었다. 덕분에 체감상 그 기간은 더욱 대단하게 느껴졌다. 8월이 시작되면 세찬 비까지 내리지는 않을 거라 감히 예상했고, 주간 일기 예보에 뜬 먹구름들은 예측하기 힘든 시기에 대한 기상청의 귀찮음을 대변한다고 여겼다. 그리고 촬영 일주일 전, 비가 계속 올 거라는 일기 예보를 보고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지금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그때 되면 안 오겠지.” 테스트 촬영을 위해 모인 스태프들은 서로 이렇게 위로했다. 아니, 나를 위로했다. 나도 웃으며 맞장구를 쳤지만, 첫 연출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연출이었고, 졸업 영화라는 타이틀은 ‘될 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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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IZ {G와 R} 1.1 G는 왕이다. 지구 껍데기 위의 모두가 G의 식민지다. G는 위에서 아래로 우리를 짓눌러 위와 아래를 가르치고 예의를 알려준다. 꾸준하고 한결같다. 어제보다 강하거나 내일 약해지지 않는다. 왕 때문에 핸드폰을 얼굴에 떨어뜨리고, 왕 덕분에 컵에 커피를 따를 수 있으며, 왕 덕분에 둥근 지구에서 ‘자꾸 걸어나가’도 떨어지지 않고 외국인을 만날 수 있다. G, 우리의 왕, 이것을 막을 방법도, 피할 땅도 없다. 이것은 약속이다. 1.2 수평선에서 배가 사라지는 것, 개기월식, 개기일식을 보고 몇몇 영민한 사람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걸 눈치챘다. 하지만 왜 사람들이 떨어지지 않는지는 알지 못했다. 윌리엄 길버트(William Gilbert)는 자석을 떠올렸다. 달과 지구, 지구와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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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떤 것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변화’라는 현상에서 기인한다. 한 철학자의 말처럼 ‘생각’이라는 ‘감각’이 ‘존재’를 보장하듯, 우리가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감각 기관을 통해 변화를 인지해야 한다. 그리고 그 변화가 클수록, 다시 말해 감각이 영향을 받을수록 존재를 더 확실히 인식하게 된다. 그런데 이때 변화를 위해 필수적인 것이 ‘시간’과 ‘공간’이다. 물리적으로 접근했을 때 이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지만, 그런 이론적인 측면을 제외하고도, 시간과 공간이 보장되지 않으면 ‘변화’라는 것을 필두로 ‘존재’에 대한 담론을 이어가기 힘들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필수적인 ‘시간’과 ‘공간’은 존재 인식을 위해 필요한 ‘수단’이 된다. 자극을 넘어서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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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이 손을 흔들며 지나가고 12월에 접어들자, 한 점의 온기 없는 바람이 겨울의 도착을 알린다. 서로를 채찍질하던 잎을 잃은 나무들은 조용히 몸을 흔들고 태양의 마지막 햇빛 웅덩이가 증발하며 도시는 어둠에 몸을 담근다. 그러자 어느새 9시. 막 퇴근한 그녀의 손을 잡고 거리를 걷는다. 아이스크림 가게 앞의 실외 배너가 쓰러져있고 도망칠 수 없는 나무처럼 가게들이 우직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가게는 없다. 녹아있던 땅과 가게는 다시 얼기 시작했다. 샅바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바이러스는 우리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다시 우리를 희롱한다. 바이러스가 경제를 휘청거리게 할 거라고 생각했지, 경제에 린치를 가할 줄은 몰랐다. 우리가 바이러스를 지배할 것이라고 생각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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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기간이었다. 대부분 시험이 리포트로 대체되었고, 때문에 좀 더 다양한 측면에서 글을 진행해봐야겠다는 이유로 핸드폰을 켜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살피고 있었다. 아쉽지만 유튜브에는 A+를 받을만한 신선한 접근법이 나와 있지 않았다. 물론 검색어가 잘못되었을지도 모르고, 다양한 분야로 안내하던 알고리즘은 글의 수준을 높여줄 만한 영상으로 안내하지 않았다. 영상을 찾을 수 없어 다음으로는 이런저런 커뮤니티의 글들을 살폈다. 유머가 가미될수록 글의 흥미도가 높아질 것이라는 생각에 선택한 것은 ‘유머 게시판’이었고, 재미있는 글 하나를 발견했다. 한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캡처해 온 듯한 글의 제목은 ‘20대 후반에 깨달은 것’이었고, 내용은 대인관계, 체력관리 등을 포함한 다섯 가지로 된 조언 또는 일종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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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에 과외가 있었다. 장소는 ‘스터디 카페’ 안에 있는 ‘스터디 룸’이고, 정각이었지만 학생은 도착 전이었다. 늘 5분 이상 기다리는 게 일상이었기에, 화이트보드 위치를 조정하고 앉아서 내일 일정표를 점검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학생일 터였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네’라고 답했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사람은 스터디 카페의 주인이었다. 뭔가 작은 문제가 생긴 것을 직감했고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물음을 대신했다. ‘유감이다’라는 단어가 도드라진 표정과 함께 그는 예약한 시간이 변경된 것 같다고 말했다. 직감이 맞았다. 동시에 전날부터 시작된 방역 2단계에 포함된 사업장 수칙이 머리에 스쳤다. 학생 쪽에서 예약을 취소했거나 다른 날로 예약 시간을 변경한 것이었다. 생각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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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으로 영화를 보러 갔다. 집에서 약 1시간 정도 걸리는 곳으로 영화를 보러 간 이유는 영화가 끝나고 약 2시간 정도 진행되는 평론가의 해설 때문이다. 주말이었고, 영화 시간과 비슷한 2시간 동안 해설을 진행한다고 했을 때 생각나는 평론가가 있다면 이 글이 좀 더 흥미로울 수도 있겠다.(참고로 이 평론가의 제일 길었던 해설 시간은 약 5시간으로 알고 있다.) 심오한 영화라기보다는 오히려 너무 단순한(것처럼 보이는) 작품이었다. 병에 걸린 소녀가 등장하고, 성실과는 거리가 먼 남자에게 첫눈에 반한 뒤, 삶이 끝나기 전까지 사랑하는, 뭐 그런 내용이다. 제목을 말하지 않는다면 이 영화를 쉽게 찾을 수 없을 것이다.(그날 나와 같은 공간에서 해설을 들은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만큼 어디서 분명 본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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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 있는 사람을 사랑해본 적 있나요. 언젠가 한 친구는 애인이 있는 사람이라면 친구 이상의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저도 그렇습니다. 알랭 드 보통은 우리가 어떤 사람을 충분히 알기도 전에 사랑에 빠진다고 합니다(‘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맞습니다. 연애를 시작하면 언제나 썸탈 때까지는 보이지 않던 게 보이고, 봤던 것도 다르게 보입니다. 연애 초반에는 그런 면이 좋다가, 나중에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싫증이 납니다. 그런데 저와 제 친구는 그 사람에게 애인이 없는지를 확인해야 사랑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희 둘의 생각과 보통의 생각이 부딪히지는 않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얻기 전에 사랑에 빠지지만, 적어도 애인이 있는지는 알아야 사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