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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와 인플레이션

우리도 씁니다 2021. 1. 18.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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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를 남발하면 나중에 의미가 닳을 것 같아.” 내가 말했다. 

나는 어두운 방의 침대에 누워있었다. 다리를 뻗어 개어놓은 이불 위에 발을 걸치고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고 책상 위 스탠드 하나만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그녀가 대답했다. “아끼면 똥 돼.”

 

11월. 우리 사이를 여기까지 끌고왔던 ‘좋아해’를 ‘사랑해’가 밀어냈다. 

‘사랑해’는 강했다. ‘사랑해’가 한 번 들어오자 ‘좋아해’는 역사의 반동주의자처럼 거슬렸고 눈치를 받았다. 그래서 어느 순간 ‘좋아해’는 ‘사랑하지 않아’라는 억울한 의미를 입고 짐을 싼 채 쓸쓸히 우리의 대화 밖으로 쫓겨났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정권이 끝나고 귀양을 가는 정치인처럼. 11월, 나와 그녀는 ‘사랑해’라는 말을 자주하기 시작했다.

 

옛 경제 교과서와 한 인터넷 기사를 기억한다. 

초록색 표지의 경제 교과서는 인플레이션을 설명하고 있었고 줄글 밑에 1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 사람의 모습이 있었다. 지폐를 연료로 사용하는 여성이었다. 한편, 인터넷 기사도 인플레이션을 취재한 내용이었고 글 중간에 베네수엘라 시장을 찍은 사진이 있었다. 지폐로 만들어진 가방이었다. 두 사진 모두 지폐의 가치와 교환의 균형이 제대로 망가졌다는 걸 보여주는 삽화였다.

 

 

삽화를 본 기억이 나를 걱정에 빠지게 했다. 

우리의 언어도 밖으로 넘쳐흐르기 시작하면 가치가 떨어지지 않을까?, 라는 그럴듯한 걱정. 하루에 수십 번 발행하는 지폐와 하루에 한 번 발행하는 지폐의 가치가 다르듯이, 하루에 수십 번 입에서 나오는 ‘사랑해’와 명품처럼 하루에 한 번 입에서 나오는 ‘사랑해’의 강도가 다르지 않던가? 그래서 나중에 ‘사랑해’의 의미가 변질되고 가벼운 말이 되는 상황을 미리 걱정했다. 다시 말해, ‘사랑해’가 ‘밥 먹어’, ‘이제 끊을게’, ‘조용히 해’, ‘한 번만 봐줘’로 바뀌는 상황과 진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사랑해’ 수십 개를 전해야하는 풍요 속의 빈곤을 상상했던 것이다.

 

나의 부족한 지식으로 아는 바, 

장기적인 관점에서 ‘일반적인’ 인플레이션은 통화량에 비례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그렇다면 어떻게 인플레이션을 잡는가? 총수요 관리가 기본이다. 정부는 정부지출을 삭감하거나 세금을 더 거두고 중앙은행은 금리를 올리고 시중에 풀릴 통화량을 억제한다. 마찬가지로 말의 양을 억제해야 말의 가치를 지킬 수 있다고, 내 딴엔 그렇게 판단했다. 아,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사랑해’는 하루에 한 번만 하자고 말했다(꼴값이라고? 동의하는 바다. 주먹 내려놓으시길). 이때 나의 결정은 한국은행 총재의 근엄한 결정처럼 단호했다. 그러자 그녀의 반응은? 정적. 그리고 내 귀에 들린 말: ‘아끼다가 똥 된다’. 협상 결렬. 나는 아무 말 없이 천장을 봤다. 거기서 답이 나올 것처럼. 하지만 내 방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물었고

그녀가 이렇게 대답했던 것 같다.

불행한 계기로 갑자기 사랑의 기간이 끝날 수 있으며, 그러한 이유로 현재의 상황이 무한하지 않음을 항상 알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해야 한다고. 그녀는 나와 전제부터 달랐다. 우리의 사랑이 지폐 발행 기계라고 비유한다면, 나는 –오만하게도- 사랑이 꽤 오래가는 기계라고 생각했다. 반면, 그녀는 갑자기 고장 나고 헐거워질 수 있는 기계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실 그녀의 생각이 타당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나는 버텼다. ‘사랑해’가 가벼운 말이 되고 다른 의미로 변질되면 무슨 의미가 있냐고, 계속 말해도 ‘똥’ 된다고.

 

그러자 그녀가 받아쳤다. “알겠어, 그런데 만약 내일 내가 죽으면?” 그리고 정적. 그 말을 듣고 놀란 나는 갑자기 고장 난 인형처럼 ‘사랑해’를 반복하면서 중얼거렸다. 신중하게 아껴뒀던 단어를 풀었다.

 

 

 

 

by. 얼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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