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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씁니다
우씁니다 페이지에 글을 연재하기 시작한지 네 달 정도 흘렀다. 매주 하나씩 글을 쓰는 데에도 조금은 익숙해졌다. 하지만 익숙해진다고 글을 쓸 때 들어가는 시간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어떤 때는 세 시간 만에 써 버리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며칠을 공들여 쓰기도 한다. 레베카 솔닛은 맨스플레인에 대한 에세이 를 쓸 때 순식간에 썼다고 한다. 는 자신을 가르치려 드는 남성에 대한 일화로 글을 시작한다. 이 남성은 솔닛의 말을 중간에 끊으면서 권위적인 태도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나중에는 한 책을 꼭 읽어야 한다고 역설하는데, 그 책은 솔닛이 쓴 책이었다. 글은 곧장 강간 문화와 여성의 생존권으로 흘러간다. 여성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고 신빙성 없는 이야기라고 여기는 사회이기 때문에 데이트 폭력이나 강간이..
♬음악: Nils Frahm - My Friend the Forest “질문. 다른 나라로 간다면 어디서 살고 싶나요?” 그녀가 물었다. “음, 독일?”, “헐, 내가 가고 싶었던 곳이었는데.” 그녀는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1년 정도 교환학생으로 독일에 갈 생각이었다고 고백했다. 독일? 왜? 그녀는 이유를 설명했다. 독일에는 유수한 제약회사가 많다고.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가 말하길, 만약 그녀가 독일이 마음에 든다면 독일 대학에 편입하고 그곳에 살아도 된다고 말했다고. 그때 나는 아찔함을 느꼈다. 순전히 우연이었다. 우리가 만난 것 말이다. 그 사실이 아찔했다. 그녀가 독일로 갔다면? 우리는 영원히 모르는 사이가 되었겠지. 통화가 끝나고 조건(if)이 많은 알고리즘들이 머릿속을 채웠다. 그리고 우리 사이를..
1. 이름도 모르는 타인을 눈에 담는다. 사람들은 그것을 ‘훔쳐본다’고 한다. 우리는 지하철에서, 학교에서, 일터에서 저 남자가 보는 영상, 저 여자가 든 핸드백, 그들의 반지, 시계, 그들이 읽는 책, 그들이 가진 핏줄과 머리카락을 훔쳐본다. 그리고 그 조각을 모아 상상의 인물을 만든다. 사람의 껍데기를 몰래 보는 것은 폭력일 수도 있다. 하지만, 껍데기로 채울 수 없는 빈 공간에 상상을 채워 넣는 건 흥미롭다. 재밌는 점은 상상이 어설픈 앎으로 변하고, 종종 어설픈 앎은 우리를 사랑에 빠지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어설프게 알기 때문에 지원하고 싶은 학과가 사랑스럽고, 어설프게 알기 때문에 연예인에게 빠지는 것처럼. 2. 완벽한 대칭인 공작나비, 한 쪽 눈이 없는 네페르티티의 흉상. 자, 우리는 어..
♬ 음악: On the Nature of Daylight 그림 하나를 상상하곤 한다. 해변에 큰 배가 정박해 있고 중년 둘과 어린 짐승 셋이 있는 그림. 그 그림을 보니 갑자기 진짜 이야기를 하고 싶다. 물론 난 그 시절을 모른다. 귀로 들은 이야기와 상상이 뒤섞여있다. 형이 있었다고 들었다. 열네살 위의 형. 나는 열네 걸음 앞선 남자를 보며 내 삶의 리허설을 볼 뻔했다. 하지만 그는 일찍 죽었다. 형은 나와 같은 부모의 세포에서 이 세상으로 밀려왔다가 다시 여백이 된 것이다. 파도처럼. 아버지와 친할머니는 못가겠다는 어머니를 두고 산에 올라갔다. 그리고 어린 겨드랑이에 꽂았던 손으로 어린 뼛가루와 익은 술 냄새를 뿌렸다. 모유색의 뼛가루는 분필가루가 되어 추억을 그렸을까? 산의 나무들은 나의 부모가 ..
혹시나 싶어서 준비해 간 휴지를 다 쓰고 마지막 남은 휴지를 다섯 번이나 접었다. 휴지를 더 많이 챙겨올걸. 휴지를 여섯 번째 접으니 콧물이 새어 나왔다. 너에게 마지막으로 ‘사랑해’를 던졌고 너는 내가 던진 ‘사랑해’를 맞고 꿀럭였다. 방에 돌아와서 사진을 지웠다. 편지를 꾸기고 선물을 꺼내고 반지를 버렸다. 쓰레기봉투가 아직 절반은 남아 있었지만 묶어서 내다 버렸다. 방 안이 쌀쌀했고 발이 시려웠다. 의자를 젖혀 천장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다 속에서 두 번이나 걸렸다. 그동안 너무 많이 ‘사랑해’를 찍어낸 탓인지 ‘사랑해’는 너를 감동시킬 수 없었다. 다 쓰지도 못하고 남아버렸다. 그렇지만 물건은 버려도 ‘사랑해’는 버릴 수가 없었다. 혹시 모르니까 그동안 ‘사랑해’를 은행에 맡겨 ..
와인을 너무 많이 넣었나 보다. 머리가 띵하고 세상이 돈다. 그릇을 물에 담가 두고 소파 위로 떨어진다. 30평 집 안에서 고요가 팽창한다. 기분 좋은 고요의 무게에 눌려 소파 깊숙이 파묻힌다. 눈을 뜨니 엄마가 현관문 앞에 서 있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면서 나를 발견했나 보다. 고개를 젖혀서 주황색 햇빛에 익은 눈으로 이마 뒤를 살핀다. 해가 지고 있다. 해는 아파트에 가려졌지만 여전히 벌떡이고 있었다. 나는 벌떡이는 해의 박동을 느낄 수 있었다. 꿈틀거리는 해와 꿈틀거리는 조직의 횡단면. 소의 간이 반으로 갈라졌다. 갈라진 조직은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는 것 같다. 송골송골 맺힌 피가 점점 커지다가 뭉쳐지고 이내 주륵 흐른다. 선홍빛 단면 위로 피가 줄기를 이루며 흘러내린다. 울퉁불퉁한 연회색 시멘트..
“‘사랑해’를 남발하면 나중에 의미가 닳을 것 같아.” 내가 말했다. 나는 어두운 방의 침대에 누워있었다. 다리를 뻗어 개어놓은 이불 위에 발을 걸치고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고 책상 위 스탠드 하나만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그녀가 대답했다. “아끼면 똥 돼.” 11월. 우리 사이를 여기까지 끌고왔던 ‘좋아해’를 ‘사랑해’가 밀어냈다. ‘사랑해’는 강했다. ‘사랑해’가 한 번 들어오자 ‘좋아해’는 역사의 반동주의자처럼 거슬렸고 눈치를 받았다. 그래서 어느 순간 ‘좋아해’는 ‘사랑하지 않아’라는 억울한 의미를 입고 짐을 싼 채 쓸쓸히 우리의 대화 밖으로 쫓겨났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정권이 끝나고 귀양을 가는 정치인처럼. 11월, 나와 그녀는 ‘사랑해’라는 말을 자주하기 시작했다. 옛 경제 교과서와 ..
“나도 왕년에는” 박은 숨을 후 내쉬고 말을 이었다. “비 좀 맞았어.” “비? 학점 말하는 거야?” 나는 무슨 말을 하냐는 표정으로 물었다. “야 너가 비만 많이 맞았냐? 씨도 많이 맞았지. 아주 흠씬 두들겨 맞았지.” 전이 술집의 시끌벅적한 소음에 한 몫 더하며 외쳤다. “아니! 레인 말하는 거잖아. 하늘에서 내리는 레인.” 박이 웃으며 말했다. “대학생 때는 비 맞는 거 좋아했거든. 아니 지금도 싫어하지는 않아. 오히려 맞고 싶어. 그런데 지금은 비를 맞으려면 작정을 해야 한단 말이지. 포마드스타일로 머리를 빗어 올리고 왁스를 바르면서, 가방에 512기가바이트 맥북 프로를 들고 다니면서, 천연가죽으로 만든 구두를 신으면서, 결정적으로 자동차를 타면서 비를 맞을 수 없게 되어 버렸어.” 대학 시절에 ..
연말이 되면 조금 설렌다. 크리스마스에 선물 받을 나이는 훨씬 지났으면서 캐롤을 들으면 언제나 설렌다. 시끌벅적한 송년회에서는 한동안 못봤던 친구들을 만나서 못다한 이야기들을 나눈다. 비록 올해에는 잘 해결되지 않았던 일들이 내년에는 잘 해결될 거다. 뉴스에서는 여자 엥커가 평소와는 다르게 들뜬 목소리 톤으로 제야의 종 타종 행사 상황을 보도한다. 오늘 하루만큼은 여자 엥커도 목소리를 깔지 않아도 된다. 올해도 다사다난했지만 결국은 해피엔딩이다. 우리와 다르게 수천만 년 전에 살았던 고대인들은 추운 겨울이 영원히 지속되진 않을까 두려웠을 거다. 몇백 번의 밤 전에도 엄청 추운 날들이 있었지만 몇십 번의 밤을 보내고 나니 따뜻해졌다. 하지만 이번에도 따뜻해질 거라고 어떻게 보장해? 확실히 하고 싶었을 거다..
돌아보니, 시작은 ‘동경’이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동경은 두가지 뜻을 가지고 있는데, 각각은 다음과 같다. 동경(憧憬) · (명) 어떤 것을 간절히 그리워하여 그것만을 생각함. · (명) 마음이 스스로 들떠서 안정되지 아니함. 나의 마음은 2번에서 1번으로 흘러갔다. 모든 마음을 빼앗겨, 내 힘으로는 그것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일을 할 때에도, 누군가를 만나고 있는 순간에도, 잠이 쏟아져서 더 이상은 눈꺼풀의 무게를 견딜 수 없을 때를 제외한 모든 시간에 내 마음은 그 곳에 가 있었다. 그 곳을 ‘음악’이라고 이야기해왔다. 유순한 성격 덕에 좋아라 했던 중학교 친구를 다시 만난 20살에 그 친구가 만든 노래를 처음으로 듣게 되었다. 그 위상이 갑자기 ‘동경의 대상’이 된 내 친구는 하고 싶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