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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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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재해 무발생 150일째. 건설 현장에 처음 출근하면 받아야 하는 안전교육을 받기 위해 교육장에 모여서 처음 본 팻말이었다. 그러니까 이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사람이 죽거나 크게 다쳤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교육자는 이 현장에서 사람이 죽었다고 말했다. 건설 현장에서 일을 하기 위해서는 기초건설안전교육을 받아야 한다. 이 교육에서 교육자는 한 영상을 보여줬다. 멀리에 있는 CCTV에 찍힌 건설 현장의 모습이었다. 사람은 개미처럼 작았고 수십 톤이 넘는 건축 자재는 레고처럼 보였다. 타워크레인으로 건축 자재를 들어 올리는데 중간에 줄이 풀렸다. 레고처럼 건축 자재가 통통 튀었고 개미 같은 사람이 맞고 쓰러졌다. 마찬가지로 중대재해 사고 현장이었다. 다시 말해서, 레고 같은 건축 자재에 맞은 개미 같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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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안암에서 한양대학교까지 자전거를 탈 때 크게 세 가지의 길이 있다. 나는 그중에서 청계천을 따라가는 길을 가장 좋아한다. 나는 이 길을 청계천 하이웨이라고 부른다. 청계천 하이웨이는 자전거 전용도로다. 뒤에 있는 자동차가 클랙슨을 울릴까 봐 빨리 달릴 필요가 없다. 그리고 하이웨이답게 신호등이 없다. 한번 받은 신호를 계속 받으려고 조바심을 내지 않아도 된다. 초가을 아침 청계천 하이웨이는 모든 것의 경계가 뚜렷해진다. 듬성듬성 군락을 이룬 갈대는 검은색 테두리라도 있는 것처럼 그 뒤의 청계천과 구분된다. 청계천 하이웨이 위로 펼쳐진 고가도로 사이로 비치는 햇빛은 밝음과 어두움을 칼로 베어버린다. 고가도로가 구름 걷히듯 사라지면 학교에 거의 다 온 것이다. 이제 경계는 햇빛 속으로 사라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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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 있는 사람을 사랑해본 적 있나요. 언젠가 한 친구는 애인이 있는 사람이라면 친구 이상의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저도 그렇습니다. 알랭 드 보통은 우리가 어떤 사람을 충분히 알기도 전에 사랑에 빠진다고 합니다(‘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맞습니다. 연애를 시작하면 언제나 썸탈 때까지는 보이지 않던 게 보이고, 봤던 것도 다르게 보입니다. 연애 초반에는 그런 면이 좋다가, 나중에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싫증이 납니다. 그런데 저와 제 친구는 그 사람에게 애인이 없는지를 확인해야 사랑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희 둘의 생각과 보통의 생각이 부딪히지는 않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얻기 전에 사랑에 빠지지만, 적어도 애인이 있는지는 알아야 사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