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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타 변이 바이러스

우리도 씁니다 2021. 9. 14.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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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것은 2020에 찍힌 쉼표였다.
쉼표 너머에 풍경이 보인다. 가해자가 환자인 풍경. 마스크가 x의 1제곱처럼 새삼스럽지 않은 풍경. 지하철에서 동시에 메아리치는 재난문자로 지역주민인 걸 알게 되는 풍경. 유치원 아이들이 마스크를 코에 꾹 누르는 기술을 완벽하게 연마하는 풍경. 대학교 책상 서랍에 거미줄이 쳐지고 청춘이 생략되는 풍경. 깔끔한 지옥이 된 상가의 풍경. 사람들이 사람들을 주춤거리게 하는 풍경. 찝찝함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풍경. 나가고 싶다는 공동체의 처절한 욕구와 거리두기 정책이 대립하는 풍경. 경제와 방역이 대립하는 풍경. 양성과 음성이라는 이진법이 팽팽하게 긴장된 줄을 선 사람들의 운명을 가르는 풍경. 이런 풍경이 계속되는 원인은 명확했다. 백신의 부재, 백신의 부재, 백신의 부재. 그것이 전부였다.

시간은 흘렀다.
바이러스의 시간, 사람의 시간 모두. 그리고 2021. 드디어 화이자니, 아스트라 제네카니, 바다에서 건너온 백신 소식이 사람들을 설레게 했다. 백신은 인류가 고안해낸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이었으니까. 그동안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개연성도, 출처도 알 수 없는 민간요법(공업용 에탄올, 마늘, 카레, 소금물, 락스, 소똥)으로 인류는 글로벌하게 헛짓거리를 해댔다. 휴, 결국 백신은 인류가 일상을 잃은 거지 이성을 잃은 게 아니라는 걸 증명했다. 아직 아득한 길을 보면 걸음마도 아닌 이제 막 발가락이 생긴 정도의 성취이지만, 그리고 부작용도 있었지만, 백신 개발은 좋은 소식이었고 옳은 방향이었다.



백신이 한반도에 착륙한 날.
백신이 사람들의 팔뚝에 들어간 날, 갈망과 실망 사이에서 방황하던 사람들은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전에는 상상할 용기도 안 났던 것들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가족은 휴가를, 학교는 대면 수업을, 정부는 거리두기 완화를 슬슬 준비했다.


2.
“사마귀가 매미를 잡으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호수를 따라 걷다가 그가 물었다.
“무슨 소리야? 먹겠지, 아마?”
“사마귀가 매미를 잡으면 참새가 뒤에서 기다려.”

바이러스에게 ‘오류’라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오류는 새로운 걸 만들어냈다. 이름은 델타. 인도에서 태어났고 중국 국적의 선배를 뛰어넘는 후배. 한국이 델타에게 가지 않았지만 결국 델타가 한국에게 왔다. 델타 변이가 한국에서 발견됐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물컵에 잉크를 떨어뜨린 것처럼, 세면대에 반지를 떨어뜨린 것처럼.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평화로웠다. 드물게 찾아오는 조용하고 게으른 며칠이었다. 하지만 곧 상황은 무서워졌다. 자, 전염의 고삐가 풀렸다. 사람들이 술렁댔다. 델타의 격렬한 도착을 알린 건 숫자였다. 숫자들이란 얼마나 솔직한지! 어제의 기록을 산산조각 내는 막대그래프가 줄줄이 세워졌다. 이 비극적인 막대 안에는 진실과 당혹이 모두 담겨 있었다. 다시 대유행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진실과 당혹이.


3.
오리지널과 변이의 원투펀치 이후,
코로나의 마침표는 우리를 희롱하며 멀어졌고 익숙한 풍경이 계속되었다. 병이 날뛰는 시대, 무급휴직의 시대, 해고의 시대, 중국을 향한 확고부동한 증오심, 정부의 11월 약속, 그간의 성취가 내리막길로 굴러가는 모습, 사실에서 희망을 분리하기 시작한 사람들,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전문가적 표정을 하는 과학자들과 쇼 닥터들, 희망만 주는 존재를 미워하기 시작한 사업자들, 세월아, 네월아, 월세야를 부르며 사업을 붙잡고 있는 자영업자들, 코로나 블루를 넘어서 까맣게 타들어간 그들의 속, 출혈하고 있는 사업을 붙잡고 있는 그 미련, 경제라는 민심의 척추가 흔들리자 추경을 서두르는 정치권, 거리두기를 연장하며 침방울과 장사의 핏방울을 맞바꾸라고 요구하는 질본, 결국 터져버린 경제의 실핏줄, 스스로를 경제전문가로 자처하며 정권교체를 위해 뭉친 야당의 의원들,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 룸살롱에서 적발된 여자와 남자들, 그리고 고글 자국이 선명한 의료진, 임시선별소의 줄과 열심히 경쟁하는 백신의 줄. 4차 대유행 이후 슬슬 논의되기 시작했던 거리두기 완화 방침은 아주 짧은 해빙기처럼 지나갔다. 사람들은 다시 긴장과 단념의 기운으로, 자신의 운을 시험했던 사람들은 격리시설로, 행복한 상상을 했던 상점들은 어둠으로, 자신감을 되찾을 뻔한 정부는 가시밭길로 돌아갔다. 그것이 제자리인 마냥.

서울, 36도, 햇빛이 따가웠던 날,
그와 나는 버스 안에 있었다. 버스 안에서 에어컨의 냉기가 흘러넘쳤다. 살갗이 시려웠다. 그리고 버스가 역 앞을 지날 때였다. 임시선별소가 보였고 긴 줄과 방호복을 입고 면봉을 코에 들이미는 의료진이 보였다. 양성과 음성이라는 이진법이 줄을 선 사람들의 운명을 가를 예정이었다. “봤어?” “뭘?” “간호사들” “응.” “나이팅게일이 따로 없네.” “전쟁이니까.” “세상이 바뀐 것 같아.” “역사에 남겠지?”

4.
민주당 당내 경선에서
사회자가 이렇게 물었다.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이 누굽니까?” 전직 국무총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김빛내리 교수입니다.” 그녀가 코로나바이러스의 유전자를 가장 먼저 판독하여 백신 개발에 기여를 했다는 이유였다. 정치인이나 경제인이 아니라 과학자가 거론되다니.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세상이 많이 바뀌긴 했다. 우리가 잃은 자유의 부피만큼 달라졌다. 코로나 때문에 주식이 바뀌고, 코인이 상승하고, 트럼프가 재선에 실패하고, 갠지스강에 시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쌓이고, 메시가 바르셀로나를 떠나고, 학생들의 청춘이 생략되고, 플라스틱과 마스크가 바다에 쌓였다. 그래서 코로나는 ‘몽굴제국의 침입’, ‘로마 멸망’처럼 세계사로 못 박힐 예정이었다. 사람들이 꼼짝없이 매여있었던 역사로.

보다시피 꼼짝없이 매여 있다.
우리는 쉽게 도망가지 못한다. 다윈, 멘델 같은 과학계의 대선배들은 지금까지 인류가 발견한 것들에 아낌없는 박수를 쳐주겠지만 코로나는 사람들에게 인류가 이룩한 문명이 얼마나 연약한 엔진인지 알려줬다. 인류는 우주로 나아갈 방법을 알아도 방 안에 틀어박혀서 밖으로 쉽게 나아가지 못했다. 죽음의 덩치가 커지고 있고, 상황을 지배하려는 우리의 욕구도 커지고 있는데, 정작 지배당하는 것은 우리며, 살아본 적 없는 방식으로 적응하는 것도 우리고, 인내력이 고갈된 것도 우리다. 그저 빨리 종결하기를 바라지만 종식은 순진한 단어가 된지 오래다. 종식이라는 달콤한 구라를 치는 사람은 이제 없다. 절망도 외로웠고 희망도 외로운, 그런 암울하고 흉흉한 시대를 지나고 있다. 결국 스스로를 유배시킨 인류는 어떻게 될까? 고통받기를 거부하고, 인류의 불패를 다짐하고, 승리의 서사를 당당하게 뽑아낼까? 아니면 생각보다 더 오래, 더 큰 전염과 죽음의 덩치를 껴안고 패자의 서사를 쓸까? 결국 코로나가 양호실에서 잠깐 쉬어갈 얄팍한 꾀병으로 쓰이는 날이 올까? 두고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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