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씁니다
모호함에 대하여 본문
저 멀리 있을 땐 겨우 얕은 일렁임 따위였는데, 뭍에 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고있으면 저것은 모래사장의 무언가를 닦아내는 것인지, 되려 모래로 더럽혀 지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파도가 거셀수록 바다와 모래의 경계는 두텁게 혼탁해진다.
이것은 경계의 당연한 속성이다. 펜 촉에 힘을 주어 선을 그을 수록 그 흔적은 깊게 남는다. 종이를 가로지르는 횡축(橫軸)의 짙은 선은 공간을 분리한다. 지평선은 땅과 하늘을 분리한다. 경계는 구별짓기의 결과이며 분리의 시작이다.
명확함은 모호함 보다 인기있다. 미덕으로 여겨지기도한다. 이도저도 아닌 미적지근한 커피는 팔리지도, 메뉴판에 적히지도 않는다. 부먹찍먹만큼의 논란을 야기하진 않겠지만, 은밀한 취향을 고백하자면 한참 식은 따뜻한 커피와, 얼음이 다녹아 컵에 맺힌 물방울마저 테이블로 떨어진 ‘물반커피반’의 음료를 좋아한다.
플로뵈르의 ‘한 가지 생각을 표현하는 데는 오직 한가지 말밖에는 없다.’라는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에 깊이 공감한다. 이렇게 정합하고, 적확한 표현을 찾아 다니면서도, 극단적이고 명확한 표현에는 상처를 받는다면 너무 유약해보이려나.
곽진언님의 목소리로 처음들은 이기쁨님의 [어쩔수 없는 일]을 처음 들을 때, 눈물이 찔끔 나기도 했다. 적합한 이유를 찾지못하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치부하는 그 모호함이 나와 같아 보였다.
‘다시 생각해보면 너의 목소리는 참 따뜻했던 것 같아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봐도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아.
다가오는 사람들 내가 멀어져가고 내게 멀어지는 사람들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아.’
경계는 편리하다. 명징한 경계 앞에서는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다. 허리춤에 선을 긋고, 위는 북. 아래는 남이라 부른다. 실제 위도가 더 높아도 남일 수 있고, 낮아도 북일 수 있다. 선이 경계이기 때문이다. 손쉬운 구별이 주는 편리함은, 그 단호함에 나는 두려울 때가 있다. ‘중립국’을 외치다 바다에 몸을 던진 이명준의 고뇌와 두려움을 함께 느낀다.(최인훈의 [광장] 中) 우리 삶에는 디지털이라기보다 아날로그에 가까운 것들이 너무 많다. 빨강과 노랑 사이엔 주황이 있다. 하지만 주황에는 빨강에 가까운 주황과, 노랑에 가까운 주황이 있다. 빨강에 가까운 주황은 빨강이 되고 싶을수도 있고, 노랑에 가까운 주황은 노랑이 되고 싶을 수 있다. 주황이라는 기준만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 아쉽다. 가을 방학은 노래했다.
‘…때로는 주황 때로는 등자 열매 빛깔. 때로는 이국적인 탠저린이라 하지만 샛노랑과 새빨강 사이 어딘가 있어’
(샛노랑과 새빨강사이 中)
가사를 쓰다 보면 단어 하나와 보조사 하나에 오랜 시간을 들일 때가 있다. 이 때가 경계에서 갈팡질팡 할 때이다. 유명한 예로, 김훈 선생님은 [칼의 노래]의 첫문장인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에서 ‘꽃이’가 맞는지, ‘꽃은’이 맞을지 며칠을 고민하셨다고 한다. ‘은’과 ‘이’가 주는 사실의 세계와 주관의 세계의 차이에서, 그 경계에서 며칠을 머무른 것이다. 김훈선생님 문체가 주는 감각적 무늬는 이런 고민의 결과라고 감히 생각한다.
글을 쓰는 사람, 가사를 적는 사람, 말을 하는 사람 모두가 이 경계를 두드리는 사람이다. 황현산선생님은 ‘사소한 부탁’에서 ‘시인은 말의 껍질을 두들겨 그 안에 있는 비장한 핵심을 뽑아내려 사시사철 애쓰고 있는’ 사람들이라 하셨다. 언어를 다루는 모든 사람들은 시인이어야 할 것이다.
라면에는 찬밥이 제격이라 한다. 하지만 대부분 국물에 말은 찬밥이 여전히 차갑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수차례 토렴하다보면 밥은 미적지근한 어떤 온도에 도달한다. 밥알에 스며드는 국물의 간과 더불어, 먹기 좋은 이 온도를 사랑한다. 이렇게라도 찬밥 더운밥에 밀린 모호함을 변호해본다. 모호함은 편리에 대한 저항이지, 구분짓기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모호함은 명확함과 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되려 일물일어설에 맞는, 더욱 적확한 구분을 위한 섬세한 노력의 일환이라 봐야할 것이다.
by. 전규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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