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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씁니다
"OO해." 내가 말했다. "뭐야?" 그녀가 당황했다. "새로 만든 단어야. ‘사랑해’보다 더 사랑한다는 뜻이야." "(웃음) 이상해." "그래?“ 사실 나 역시 ‘OO’이란 발음이 억지스럽다고 생각했다. 내가 먼저 물었나? 아마 그랬던 것 같다. 새벽의 통화에서였다. 나 말고 마지막 연애가 언제였냐는, 그런 식의 질문을 했다. 그녀는 내가 상처받을 것 같다는 말을 하며 주저했다. 그러다 혼자서만 간직하던 과거를 토해냈다. 내가 그녀에게 처음 말을 걸었을 땐 이미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나에게 이런 말을 해대겠지. 멍청한 놈. 그런 걸 왜 물어봐? 그러게 말이다. 결국 나는 가학적인 상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바로 내가 요즘 듣고 있는 '사랑해'가 그녀 입에서 음..
친구가 1년 동안 사귄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말한다. “나 수진이를 좋아하지 않았던 거 같아.” “거짓말. 너 걔랑 처음 사귈 때 입이 귀에 걸려 있었어.” “그거 연기한 거야.” “지랄.” “적어도 나는 기억이 안 나. 사랑은 영원할 수 없나 봐. 처음에는 너가 말한 것처럼 정말 좋았을 수도 있어. 그런데 그게 깎이고 깎여서 결국에는 기억조차 안나.” 친구는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에서 조엘은 사랑했던 연인 클레멘타인의 기억을 지운다. 하지만 기억은 지워도 클레멘타인과 함께 했던 감정은 지울 수 없었다. 아니면 기억을 지우는 장치가 무의식까지 간섭하지는 못했거나. 어쨌든 조엘은 결국 클레멘타인을 잊지 못하고 다시 사랑을 고백한다. 친구의 기억은 조엘과 다른 순서로 지워졌다. 조엘의 기억은 가장 좋지 ..
아직 추운 날이었다. 지나가는 대학생들의 대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어색한 밤이었다. 젖은 바닥을 긁으며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도 들렸다. 준비한 말이 나오려다 목에 걸려 대롱대롱 흔들렸다. 다음에 말할까? 아니다. 오늘은 말해야 한다. 저기 걸어오는 학생들이 지나가고 나면 이야기해야지. 저기 보이는 버스정류장을 지나면 이야기해야지. 해야지, 해야지. 쑤욱. 내 팔 속으로 너의 팔이 들어왔다. 풍선에 바람이 빠지듯 나의 말이 나왔다. “우리 사귈래?” “그래.” 고개를 돌려 너를 보지는 못했지만 너는 소리 없이 웃었다. “오늘 그 말을 하려고 했어?” 너가 물었다. “아니. 다른 말을 하려고 했어.” “무슨 말을 하려고 했어?” 너가 다시 물었다. “나 너 좋아해.” 이번에는 고개를 돌려 너를 봤지만 너가 ..
우씁니다 페이지에 글을 연재하기 시작한지 네 달 정도 흘렀다. 매주 하나씩 글을 쓰는 데에도 조금은 익숙해졌다. 하지만 익숙해진다고 글을 쓸 때 들어가는 시간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어떤 때는 세 시간 만에 써 버리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며칠을 공들여 쓰기도 한다. 레베카 솔닛은 맨스플레인에 대한 에세이 를 쓸 때 순식간에 썼다고 한다. 는 자신을 가르치려 드는 남성에 대한 일화로 글을 시작한다. 이 남성은 솔닛의 말을 중간에 끊으면서 권위적인 태도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나중에는 한 책을 꼭 읽어야 한다고 역설하는데, 그 책은 솔닛이 쓴 책이었다. 글은 곧장 강간 문화와 여성의 생존권으로 흘러간다. 여성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고 신빙성 없는 이야기라고 여기는 사회이기 때문에 데이트 폭력이나 강간이..
어렸을 때 내가 쓰던 물건들은 대부분 누군가가 쓰던 물건들이었다. 형이 입었던 바지, 옆집 형이 탔던 자전거, 아래층 누나가 가지고 놀았던 소꿉놀이 세트를 조금 늦게 태어났다는 이유로 내가 물려받았다. 그래서 나는 가끔 ‘내가 제일 먼저 태어났더라면…’하고 생각했다. 내가 제일 먼저 태어났으면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물건들을 오직 나만을 위해서 사야했을 테니까. 항상 남이 사용하던 물건을 썼기 때문에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새 물건을 동경했다. TV 광고에 나온 장난감은 완벽해 보였다. 글라스데코는 한 번도 짜지 않아 꽉 차 있었고 소꿉놀이 세트는 빳빳한 박스 안에 들어가 있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저런 완벽한 물건을 어떻게 사용했길래 옆집 형과 아래층 누나는 물건에 때를 입혔을까. 나라면 그러지 않을 것..
박은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무심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유머러스하다. 그래서 과에서 인기가 많았다. 그런데 바로 그 무심한 성격 때문에자신을 향한 호감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호감을 표현하지도 못했다. 나와 전은 옆에서 답답해하며 이런 저런 조언을 해주기도 했지만 박은 알아들은 체 하고는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번도 연애를 해보지 못 한 채로 두 학년을 다니고 박은 군대를 가버렸다. 그 뒤를 따라서 전과 내가 순서대로 입대했다. 2010년 2월 내가 셋 중에 마지막으로 제대하고 캠퍼스를 찾았을 때, 박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전의 설명에 따르면 박은 제대하고 스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그녀를 만났다. 둘은 리프트 아래에서 리프트 이용권을 검사했다. 10시간 가까이 서..
“너 일본 좋아해?” 생활실에서 일본어를 공부하고 있으면 선임들은 나에게 자주 이 질문을 했다. 한 국가 안에 있는 정치, 사회, 문화, 역사, 과학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하나로뭉쳐서 좋고 싫음을 가릴 수 있을까. “어떤 건 좋고 어떤 건 싫습니다.” 선임은 영어를 공부하는 후임에게는 다른 질문을 했다. “너 영어 잘해?” 2018년 월드컵 때 후임 한 명이 물었다. “김도겸 님은 한국이랑 일본 경기에서 어디 응원하십니까?” “잘 모르겠네.” 이런 질문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친구에게 하니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너는 그런 말 들으면 화 안 나?” 별로 안 났다. 한국과 일본의 축구 경기를 다룬 기사에서는 다른 나라와의 경기를 다룬 기사와 다르게 숙적, 투혼 등의 전쟁을 연상시키는 단어가 자주 사용된다. ..
혹시나 싶어서 준비해 간 휴지를 다 쓰고 마지막 남은 휴지를 다섯 번이나 접었다. 휴지를 더 많이 챙겨올걸. 휴지를 여섯 번째 접으니 콧물이 새어 나왔다. 너에게 마지막으로 ‘사랑해’를 던졌고 너는 내가 던진 ‘사랑해’를 맞고 꿀럭였다. 방에 돌아와서 사진을 지웠다. 편지를 꾸기고 선물을 꺼내고 반지를 버렸다. 쓰레기봉투가 아직 절반은 남아 있었지만 묶어서 내다 버렸다. 방 안이 쌀쌀했고 발이 시려웠다. 의자를 젖혀 천장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다 속에서 두 번이나 걸렸다. 그동안 너무 많이 ‘사랑해’를 찍어낸 탓인지 ‘사랑해’는 너를 감동시킬 수 없었다. 다 쓰지도 못하고 남아버렸다. 그렇지만 물건은 버려도 ‘사랑해’는 버릴 수가 없었다. 혹시 모르니까 그동안 ‘사랑해’를 은행에 맡겨 ..
“‘사랑해’를 남발하면 나중에 의미가 닳을 것 같아.” 내가 말했다. 나는 어두운 방의 침대에 누워있었다. 다리를 뻗어 개어놓은 이불 위에 발을 걸치고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고 책상 위 스탠드 하나만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그녀가 대답했다. “아끼면 똥 돼.” 11월. 우리 사이를 여기까지 끌고왔던 ‘좋아해’를 ‘사랑해’가 밀어냈다. ‘사랑해’는 강했다. ‘사랑해’가 한 번 들어오자 ‘좋아해’는 역사의 반동주의자처럼 거슬렸고 눈치를 받았다. 그래서 어느 순간 ‘좋아해’는 ‘사랑하지 않아’라는 억울한 의미를 입고 짐을 싼 채 쓸쓸히 우리의 대화 밖으로 쫓겨났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정권이 끝나고 귀양을 가는 정치인처럼. 11월, 나와 그녀는 ‘사랑해’라는 말을 자주하기 시작했다. 옛 경제 교과서와 ..
연말이 되면 조금 설렌다. 크리스마스에 선물 받을 나이는 훨씬 지났으면서 캐롤을 들으면 언제나 설렌다. 시끌벅적한 송년회에서는 한동안 못봤던 친구들을 만나서 못다한 이야기들을 나눈다. 비록 올해에는 잘 해결되지 않았던 일들이 내년에는 잘 해결될 거다. 뉴스에서는 여자 엥커가 평소와는 다르게 들뜬 목소리 톤으로 제야의 종 타종 행사 상황을 보도한다. 오늘 하루만큼은 여자 엥커도 목소리를 깔지 않아도 된다. 올해도 다사다난했지만 결국은 해피엔딩이다. 우리와 다르게 수천만 년 전에 살았던 고대인들은 추운 겨울이 영원히 지속되진 않을까 두려웠을 거다. 몇백 번의 밤 전에도 엄청 추운 날들이 있었지만 몇십 번의 밤을 보내고 나니 따뜻해졌다. 하지만 이번에도 따뜻해질 거라고 어떻게 보장해? 확실히 하고 싶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