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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씁니다
서울에서 가장 높은 건물 롯데타워. 높은 건물은 어디에서나 눈에 띄어서 도시의 랜드마크가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롯데타워는 어디에서도 볼 수 있지만 가까이서 본 사람은 많지 않다. 지하철에 연결된 지하도를 통해서, 지하주차장의 엘리베이터를 통해서 건물에 들어가니 거대한 건물을 실제로 보기는 쉽지 않다. 롯데타워 뿐만이 아니라 다른 거대 구조물도 마찬가지다. 서울에 있는 대교, 고가도로, 높은 빌딩, 한강의 크기를 느낄 기회는 많지 않다. 언제나 차를 타고 거대 구조물을 지나치니까. 거대 구조물의 크기를 느끼기 위해서는 속도를 줄여야 한다. 마포대교를 걸어서 건너본 적이 있다. 전철이나 버스를 타고 지날 때는 1분 만에 건널 수 있었는데 걸어서 건너려니 15분이 넘게 걸렸다. 대교大橋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
내가 사는 안암에서 한양대학교까지 자전거를 탈 때 크게 세 가지의 길이 있다. 나는 그중에서 청계천을 따라가는 길을 가장 좋아한다. 나는 이 길을 청계천 하이웨이라고 부른다. 청계천 하이웨이는 자전거 전용도로다. 뒤에 있는 자동차가 클랙슨을 울릴까 봐 빨리 달릴 필요가 없다. 그리고 하이웨이답게 신호등이 없다. 한번 받은 신호를 계속 받으려고 조바심을 내지 않아도 된다. 초가을 아침 청계천 하이웨이는 모든 것의 경계가 뚜렷해진다. 듬성듬성 군락을 이룬 갈대는 검은색 테두리라도 있는 것처럼 그 뒤의 청계천과 구분된다. 청계천 하이웨이 위로 펼쳐진 고가도로 사이로 비치는 햇빛은 밝음과 어두움을 칼로 베어버린다. 고가도로가 구름 걷히듯 사라지면 학교에 거의 다 온 것이다. 이제 경계는 햇빛 속으로 사라진다. ..
한양대역에서 2호선을 타고 건대 방향으로 향하면 곧장 땅 위로 올라온다. 내가 타고 있는 이 기계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지하철? 전철? 기차? 지하철이라고 하자니 땅 위로 나오는 시간이 분명 있고 전철은 구한말을 위한 단어로 남겨둬야 할 것 같다. 기차는 남한 땅 정도 되는 넓은 땅을 다녀야 하지, 수도권으로 만족할 수 없다. ‘그나마 전철이 제일 나으려나.’ 생각하던 차에 잠실을 지나며 다시 땅 밑으로 내려왔다. 지하철? 서울에 있는 대학교로 진학하며 서울에서 생활한지 벌써 5년이 지났다. 이제 스스로를 서울 사람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1년 중 대부분의 시간을 서울에서 보낸다. 고향인 포항에 내려가면 친구도 몇 안 남아 있고 할 일도 없다. 그런데 여전히 그곳에 계신 내 부모님, 우연히 경상도 ..
를 기억하시나요. 자리를 옮기며 하루에 수십 번도 넘게 일몰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행성을 떠나온 어린왕자를 기억하시나요. 어린왕자가 지구에 도착하기 전에 다섯 개의 행성에서 다섯 명의 어른들을 만났던 것도 기억하시나요? 성인이 된 지 몇 년이 지난 이제는 나는 이 다섯 명의 어른 중 어떤 어른과 닮았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아마 지리학자인 거 같아요. 지리학자는 커다란 화산은 탐구하지만 덧없는 꽃에 대해서는 탐구하지 않습니다. 직접 탐험하지 않고 탐험가에게 물어볼 뿐입니다. 어느 순간 저도 지리학자같은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아요.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단어가 화산처럼 거창해졌어요. 직접 겪은 일을 이야기하지 않고 어려워 보이는 책 속 문장을 이야기해요. 그래서 자주, 제 앞에서 동공이 풀린 채 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