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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씁니다
♬OST: 김광민 - 작은 배 1. “나 왜 사랑해?” 전기장판을 틀면서 내가 물었다. “음...널 사랑하는데 이유가 어딨어.” 그녀가 대답했다. 이번엔 그녀가 질문했다. “넌 날 왜 사랑하는데? ” 2. 누군가 ‘자신을 왜 사랑하냐’고 물을 때, 대부분은 잠깐 당황한다. 당황한 사람은 청문회의 어벙한 장관 후보자처럼 어눌하게 뜸을 들이고, 물었던 사람의 눈동자는 어서 말해 보라며 무언(無言). 답할 사람은 클리셰(Cliché)를 사용할지, 독특한 답을 할지, 거짓의 성벽으로 사랑의 땅을 보호할지, 지금 생각한 답이 뒷감당을 할 수 있을지를 계산하고, 의문만 키우는 신중한 침묵이 너무 길지 않을까 걱정한다. 침묵은 배신이니까. 3. 순간 수 많은 선택지들이 눈 앞에 보인다. “인간성이 참 마음에 들어.”..
1. 를 시작한 지 다섯 달. 매주 멤버에게 글 피드백을 받는다. “이건 무슨 뜻이야?”, “이 표현 억지야”, “이렇게 고치는 건 어떨까?” 피드백을 받을 때마다 혼자 볼 때 보이지 않았던 어처구니없는 문장이 보인다. 어젯밤에 속으로 외쳤던 ‘완벽해’라는 말은 허무하게 폐기처분된다. 이해가 가지 않은 적도 있었다. ‘왜 너는 이해를 못 하지?’ 고집도 있었다. ‘너를 위해 내 말을 포기해야 하나? 하지만 그런 똥고집만 부릴 거면 일기나 쓰는 게 낫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2.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와 「개발자의 글쓰기」를 읽었다. 두 책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나는 글쓰기의 본질은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글은 상대방과 소통하고 교감하도록 만들어져야 하는 ‘도구’라는 것. 다시 말해, 글은 다른..
♬음악: Nils Frahm - My Friend the Forest “질문. 다른 나라로 간다면 어디서 살고 싶나요?” 그녀가 물었다. “음, 독일?”, “헐, 내가 가고 싶었던 곳이었는데.” 그녀는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1년 정도 교환학생으로 독일에 갈 생각이었다고 고백했다. 독일? 왜? 그녀는 이유를 설명했다. 독일에는 유수한 제약회사가 많다고.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가 말하길, 만약 그녀가 독일이 마음에 든다면 독일 대학에 편입하고 그곳에 살아도 된다고 말했다고. 그때 나는 아찔함을 느꼈다. 순전히 우연이었다. 우리가 만난 것 말이다. 그 사실이 아찔했다. 그녀가 독일로 갔다면? 우리는 영원히 모르는 사이가 되었겠지. 통화가 끝나고 조건(if)이 많은 알고리즘들이 머릿속을 채웠다. 그리고 우리 사이를..
1. 이름도 모르는 타인을 눈에 담는다. 사람들은 그것을 ‘훔쳐본다’고 한다. 우리는 지하철에서, 학교에서, 일터에서 저 남자가 보는 영상, 저 여자가 든 핸드백, 그들의 반지, 시계, 그들이 읽는 책, 그들이 가진 핏줄과 머리카락을 훔쳐본다. 그리고 그 조각을 모아 상상의 인물을 만든다. 사람의 껍데기를 몰래 보는 것은 폭력일 수도 있다. 하지만, 껍데기로 채울 수 없는 빈 공간에 상상을 채워 넣는 건 흥미롭다. 재밌는 점은 상상이 어설픈 앎으로 변하고, 종종 어설픈 앎은 우리를 사랑에 빠지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어설프게 알기 때문에 지원하고 싶은 학과가 사랑스럽고, 어설프게 알기 때문에 연예인에게 빠지는 것처럼. 2. 완벽한 대칭인 공작나비, 한 쪽 눈이 없는 네페르티티의 흉상. 자, 우리는 어..
멀리서 드릴이 돌을 깨는 희미한 소리가 들린다. 산이 끈질기게 으르렁댄다. 이곳은 장례(葬禮)의 문턱이다. 관리자가 잠깐 기다리라고 말한다. “어, 그 사이 많이 자랐네.” 잠깐 동안 엄마와 이모는 입구 옆에 놓인 화분을 구경한다. 사라졌던 관리자가 들어오라 손짓한다. 우리는 복도를 걷는다. 고령화의 지린내와 베이비파우더가 섞인 눅눅한 냄새가 바닥을 기어 온다. 텔레비전 연속극 소리와 아기처럼 우는 어른의 소리가 천장을 기어간다. 우리는 병실에 들어선다. 1937년생 병명: 당뇨, 뇌경색, 신경통 참고: 연하곤란(dysphagia), 관절운동, 보청기관리, 체위변경, 통풍 이곳은 늙은이들이 누워있는 곳이다. 우리 할머니처럼. 이모와 엄마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말을 건다. 눈을 뜬 할머니더러 말해보라고. ..
0. 사물(事物)은 딱딱한 명사가 아니다. 명사처럼 보일뿐이지 파면 팔수록 사물에서 어떤 것이 넘쳐흐르고 팽창하는데, 그것은 형용사도 있고 동사도 있는, 복합적인 이야기다. 이야기 안에는 논리와 오감과 정서가 있다. 문제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물은 기억 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문신처럼 말이다. 예를 들어볼까, 학교 첫날에 석유 냄새를 맡았다면 석유를 보고 맡을 때마다 학교 첫날이 생각나는 식이다. 1. 크리스토퍼 아이셔우드, 『싱글맨』, 조동섭, 그책, 2009. 2. 박완서, 『그 남자네 집』, 현대문학, 2008. [싱글맨] 1.1 짐(Jim)은 죽었고 조지(George)만 남았다. 아침, 조지가 잠에서 깨면 가만히 누운 채 천장을 보다가 벌거벗은 채 욕실로 비틀비틀 걸어간다. 소변..
♬ 음악: On the Nature of Daylight 그림 하나를 상상하곤 한다. 해변에 큰 배가 정박해 있고 중년 둘과 어린 짐승 셋이 있는 그림. 그 그림을 보니 갑자기 진짜 이야기를 하고 싶다. 물론 난 그 시절을 모른다. 귀로 들은 이야기와 상상이 뒤섞여있다. 형이 있었다고 들었다. 열네살 위의 형. 나는 열네 걸음 앞선 남자를 보며 내 삶의 리허설을 볼 뻔했다. 하지만 그는 일찍 죽었다. 형은 나와 같은 부모의 세포에서 이 세상으로 밀려왔다가 다시 여백이 된 것이다. 파도처럼. 아버지와 친할머니는 못가겠다는 어머니를 두고 산에 올라갔다. 그리고 어린 겨드랑이에 꽂았던 손으로 어린 뼛가루와 익은 술 냄새를 뿌렸다. 모유색의 뼛가루는 분필가루가 되어 추억을 그렸을까? 산의 나무들은 나의 부모가 ..
1. (2020.8.26.) 흑인 대통령이 딸과 팔짱을 끼고 백악관 잔디를 걸을 때, 공화당원 백인은 인지부조화에 걸렸을지 몰라도, 동아시아 사람인 나는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끝난 줄 알았다. 내가 순진했지. 2. 조지 플로이드 사건에 이어 블레이크 사건이 터졌다. 경찰은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고, 대통령의 아들이란 놈은 그의 전과로 물타기를 시도했고 민주당은 부글거리고 있다. 이와 비슷한 일이 다시 일어날 거라고 생각한다. 두 인종은 이미 지독하게 얽혔다. 노예선을 타고 강간과 구타를 당해 온 조상 밑에서 태어난 흑인들, 총기 규제에 대해 어깨를 으쓱거리고 전통을 들먹이는 보수파 상원 의원과 제도권의 승자들, 쓰레기 같은 교육을 받고 갱스터가 되어 마리화나와 권총을 들고 다니는 흑인들, 반항하는 총..
♬ blue room- chet baker "쳇 베이커가" 친구가 입을 연다. “뭣 땜에 인생이 꼬인 줄 알아?" 나는 고개를 젓는다. "약. 약쟁이들은 멈춰야 할 때를 모르잖아.“ 아홉시 오십분. 첫 잔은 볼 안쪽과 위 속을 지져댄다. 지금은 세상의 물기가 말라서 맑아진 겨울, 잔인하게 추웠고 하늘은 빛을 벗겨냈으며 도시는 어둠으로 목욕 중. 검은 인조 장갑을 옆에 두고 우리는 홀짝인다. 와드득 깨물어 먹고 두툼한 것을 베어서 씹는다. 술을 비우고 반항기로 가득 찬다. 친구는 음악을 안다. 존 콜트레인이, 토니 버넷이, 마일즈 데이비스가, 마이클 잭슨이, 존 메이어가 얼마나 위대한지 떠든다. 왜 양희은이 우리나라에서 보물 같은 가수인지, 왜 백예린이 위대한 가수가 될 것인지 말해준다. 나는 그가 앨범에..
“‘사랑해’를 남발하면 나중에 의미가 닳을 것 같아.” 내가 말했다. 나는 어두운 방의 침대에 누워있었다. 다리를 뻗어 개어놓은 이불 위에 발을 걸치고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고 책상 위 스탠드 하나만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그녀가 대답했다. “아끼면 똥 돼.” 11월. 우리 사이를 여기까지 끌고왔던 ‘좋아해’를 ‘사랑해’가 밀어냈다. ‘사랑해’는 강했다. ‘사랑해’가 한 번 들어오자 ‘좋아해’는 역사의 반동주의자처럼 거슬렸고 눈치를 받았다. 그래서 어느 순간 ‘좋아해’는 ‘사랑하지 않아’라는 억울한 의미를 입고 짐을 싼 채 쓸쓸히 우리의 대화 밖으로 쫓겨났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정권이 끝나고 귀양을 가는 정치인처럼. 11월, 나와 그녀는 ‘사랑해’라는 말을 자주하기 시작했다. 옛 경제 교과서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