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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치기

기억, 이야기

우리도 씁니다 2021. 2. 26.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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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사물(事物)은 딱딱한 명사가 아니다.

명사처럼 보일뿐이지 파면 팔수록 사물에서 어떤 것이 넘쳐흐르고 팽창하는데, 그것은 형용사도 있고 동사도 있는, 복합적인 이야기다. 이야기 안에는 논리와 오감과 정서가 있다. 문제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물은 기억 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문신처럼 말이다. 예를 들어볼까, 학교 첫날에 석유 냄새를 맡았다면 석유를 보고 맡을 때마다 학교 첫날이 생각나는 식이다.

 


1. 크리스토퍼 아이셔우드, 『싱글맨』, 조동섭, 그책,

2009.

 

2. 박완서, 『그 남자네 집』, 현대문학,

2008.

 


[싱글맨]

1.1

짐(Jim)은 죽었고

조지(George)만 남았다. 아침, 조지가 잠에서 깨면 가만히 누운 채 천장을 보다가 벌거벗은 채 욕실로 비틀비틀 걸어간다. 소변을 보고, 몸무게를 재고, 거울을 보고, 세수를 하고, 면도를 하고, 머리를 빗고 옷을 입는다. 그리고 서재를 지나서 좁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간다. 좁은 집에 조지와 짐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매일, 해마다, 좁은 계단에서 서로 간신히 스쳐 지나갔던 이야기, 난로 앞에서 팔꿈치를 맞대고 요리한 이야기, 아침마다 커피를 마시면서 대화를 했었고 욕실 거울 앞에서 함께 면도했던 이야기. 그래서 조지는 아침마다 계단을 내려올 때 몸이 아파진다. 선 채로 꼼짝 않는다. ‘끙-’소리를 낸다.

 

 

“거의 매일 아침 계단 아래를 내려온 조지가

자기도 모르는 새

갑자기 참혹하게 꺾인 듯, 날카롭게 갈린 듯,

길이 산사태로 사라진 듯 느끼게 되는 곳도 여기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늘 처음인 양

또다시 통증을 느끼게 되는 곳도 여기다.

짐은 죽었다. 죽었다. ”

11쪽 중

 

1.2

조지가 출근을 하면

동료와 잡담을 하고 제자들 앞에서 문학 강의를 한다. 책을 읽고 구내식당에 가서 제자와 떠든다.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고 샤워를 하고 운전을 한다. 그리고 저녁, 집에 도착하기 전에 슈퍼마켓에 간다. 슈퍼마켓에 상자, 병, 팩, 깡통들이 꽉 차있다. 하지만 조심해야 했다. 그것들은 짐과 함께 요리한 재료들이니까. 이야기는 식재료에도 매복해 있었다. 그 기억이 조지를 ‘칼로 찌른다.’ 조지는 너무 힘들어한다. 혼자 먹기 싫어지고 모든 음식이 못마땅하고 구역질이 난다. 분노를 느낀다. ‘빌어먹을 음식, 빌어먹을 인생.’ 슬픔이 거세게 밀려와 조지는 무기력해진다. 조지는 식료품이 가득 담긴 쇼핑 카를 그냥 두고 나가고 싶다.

 


[그 남자네 집 ]

 

2.1

어느 날 후배가

자신이 이사를 갔다고 그녀에게 소식을 전했다. 후배는 새로운 풍경을 얘기해 주었다. 집이 대학에 가까워서 온종일 창밖만 내다보고 있어도 그 활기 때문에 심심하지 않다고. 그녀가 후배에게 대학 이름을 물었더니 성신여대라고 했다. 그녀는 좀 놀란다. 오십 년 전에 그 동네에서 살았으니까. 후배에게 위치를 자세히 물었다. 집은 성신여대와 성북 경찰서 사이였다.

 

2.2

그녀는 후배의 집으로 구경 갔다.

과거에는 기와지붕밖에 없었는데, 동네는 세련되고 활기가 넘치는 대학촌이 되었다. 그 옛날의 돈암동이 아니었다. 그녀는 머릿속 지도와 비교하면서 동네를 걸었다. 성북 경찰서를 찾고, 골목을 찾고, 목욕탕을 찾았다. 그리고 천주교당 뒤 쪽에 있던 ‘그 남자네 집’을 생각했다.

 

후배네 집에 도착하고 차를 마셨다.

후배가 내년 봄에 마당에다 이것저것 심을 계획으로 들떠서 떠들 때, 그녀는 후배를 바라보면서도 딴생각을 했다. 자꾸만 그 남자네 집은 남아 있을 것 같다는 생각, 자신과 연애했던 남자 생각, 그리고 그 남자와의 이야기를 생각했다.

 

“그 남자네가 안감천변으로 이사온 것은

우리가 그리로 이사 간 지 한 달도 안 돼서였을 것이다.”

17쪽 중

 

 

 

3.

사진 : 유준영

이야기는 사물에 쪼그라들어 박히고

뼈가 된다. 온갖 것들에 이야기가 들어있다. 가령, 그 사람이 자주 쓰던 펜, 죽은 게임이 남긴 OST, 같이 걸었던 공원, 생리가 계속되어 마음을 쓸어내린 화장실, 목울대가 치밀 정도로 더러운 기분을 느꼈던 건물. 결혼식 날 먹었던 레몬, 개가 물어다 준 그 사람 냄새가 나는 양말. 아프게 치고 들어오는 편지, 승리감을 느꼈던 잔디, 공책에 그려준 낙서, 따뜻한 말을 주고받았던 주차장과 그곳의 냄새. 내용은 기억 안 나도 누구하고 봤는지 기억나는 영화가 그렇다. 그리고 사물을 보고 듣고 맡고 맛보고 만질 때마다 이야기는 사물 밖으로 나온다.

 

음, 시간이 기억을 죽인다고?

죽인 게 아니라 압축해서 저장했다. 그래서 가끔 살아난 기억은 우리의 현재 시간에 충격을 가하고,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 우리가 담고 다듬은 기억에 우리가 허를 찔리고 우리는 딴 생각에 빠진다. 그렇게 기억이 시간을 죽인다.

 

 

 

 

by. 얼치기

 

 

얼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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