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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씁니다
정오의 파란 하늘이었다. 마스크를 내리고 숨을 쉬고 싶은 충동이 생길 만큼. 개인 주택이나 공장 위주의 인적이 많지 않은 길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몇몇 사람이 보여 필터 없는 호흡은 좀 더 미루기로 했다. 앞에서 자전거가 다가왔다. 저 자전거만 지나가면 잠깐 마스크를 내릴 수 있겠지. 그런데 마스크 위로 보이는, 중년 여성의 시선이 나를 향해 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을 알아봤다’는 것처럼 고개를 조금씩 인사하려는 듯 움직임. 누굴까. 일단 이 길에서 나를 알아볼 사람은 방금 마치고 온 과외 학생의 가족 말고는 거의 없다.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그와 가까워졌다. 순간적으로 비슷할 수 있는 모든 이미지와 다 비교해 보았지만, 전혀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내게 인사했다. “어, 안녕..
수증기에 가려진 거울 너머에 내가 있다. 나는 보이지 않는 나를 보며 면도를 한다. 조심스럽게, 베이지 않도록, 수염이 난 방향으로. 이제 머리를 말리고 옷을 입고 출근한다. 시간이 없으니 무난한 옷을 고른다. 검정색 청바지에 맨투맨을 입고 서둘러 나온다. 출근하자마자 화장실에 들러서 일을 보고 거울을 보는데 아차. 수염 한 올이 튀어나와 있다. 아마 오늘 점심을 먹을 때, 커피를 마실 때나 친구를 만날 때 신경이 쓰일 거다. 퇴근해서 집에 돌아갈 때까지 계속해서 수염 한 올이 거슬릴 거다. 그녀석을 잊어야 하나 기억해야 하나.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루에도 몇 번씩 의식의 껍질을 뚫고 그녀석이 나오는데 어떻게 그래. 그녀석을 끄집어내서 품에 안은 채 울든가 억지로 저 깊숙한 곳으로 밀어놓은 채 잠을 ..
1. 중대¹에 신병들이 도착했다. 훈련소 햇볕에 탄 피부가, 두피가 보일 정도로 짧은 머리가 눈에 띄었다. 그들은 잘생긴 건달들 같았다. 그때 마침 A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A는 스페인어를 전공한 엘리트였고 나의 먼 후임이자, 우리 소대²의 막내였다. A는 나를 보자 인사하고 송곳니를 보이며 웃었다. 나는 A에게 턱짓으로 신병들을 가리켰다. A의 표정이 굳었다. 2. 신병은 부대의 흥분과 노동력의 대명사다. 물론 ‘우리’의 신병일 때만. 내가 가리켰던 신병들은 우리 소대가 아닌, 다른 소대 소속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신병들이 오지만, 우리 소대에‘만’ 신병이 오지 않을거라는 소식을 들은 건 전날 밤이었다. A는 낙담했다. A는 최장기간 막내였다. 사실, 몇 달째 막내가 없다는, 이 기록적인 불행은 예견된..
작은 카페 앞에서 해원이 손에 든 헌 책을 살펴보고 있다. 자신이 과거에 산 책인지 아닌지 생각 중이다. 옆에서 그녀의 엄마가 말한다. “엄마가 하나 사줄게.” “됐어요. 잘못하면 집에 책이 두 권 되잖아요.” 카페에서 나온 한 남자가 그 모습을 보더니 말을 건다. “그 책들, 돈 주고 싶은 만큼만 주시면 되는데·······.” 이어지는 어색한 대화. 그리고 남자가 다시 한 번 말한다. “책들, 진짜 돈 주고 싶은 만큼만 주시면 돼요.” 그러자 해원이 말한다. “그러면, 내가 너무 드러나잖아요.” 그 말을 들은 남자가 멋쩍은 듯 웃는다. 재밌는 대사였다.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말을 직접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돈이 특히 그렇다고 생각했다. ‘주고 싶은 만큼’, ‘줘야 할 것 같은 만큼’, 이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