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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씁니다
0.1 어느 알코올 치료센터의 일화 하나. 어느 날 탕비실 선반에서 맥주잔이 발견됐다. 그러자 환자들은 조심스럽게 서로 어떤 맥주를 좋아했는지 이야기했다. 큰 잔에 담은 에일, 도수 높은 라거 등등. 환자들은 추억에 빠졌다. 따가운 탄산이 목을 간질이는 느낌, 에탄올이 위벽에 스르륵 흡수되는 느낌, 침울하고 나른했던 느낌. 그러자 그들 사이에서 불길한 징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0.2 중독은 뇌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그래서 환자들 사이에서 ‘치어스 Cheers’라고 장난치는 것도 위험하다. 깊게 남은 중독의 흔적은 작은 단서에도 꿈틀거리니까. 작은 단서에도 꿈틀거리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맥주잔처럼 이미지 하나가 위험하다. 내 눈에 스치는 간판, 게임, 기사 제목, 버스 옆면에 붙은 광고, 영상..
코로나가 한국에서 유행하기 시작한지 1년이 지났다. 마스크를 쓴 모습은 익숙하고 마스크를 쓰지 않은 모습은 놀랍다. TV에 2019년에 촬영한 예능이 흘러나오면 길거리에 수많은 사람들이 마스크도 쓰지 않고 돌아다니고 있어서 깜짝 놀란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가 보려 하지 않았던 사회의 문제를 표면 위로 떠오르게 하고 눈에 보이게 했다. 다양성에 대한 공격,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집단의 이익을 위해 쉽게 무시해 버리는 태도가 표면 위로 떠오른 우리 사회의 문제다. 아는 사람이 얼마 전 유럽의 오스트리아에서 돌아왔다. 인구가 900만 명인 오스트리아에서는 매일 3000명의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자가 나오고 있다. 매일3000명당 1명 꼴로 감염되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나라는 인구가 5천만 명인데 매일 400..
2018.09.XX 늦은 답장을 써보려한다. 이제서야. 그래보려 한다. 헤아려보니, 달을 넘기고도 보름 즈음이 더 지났다. 네 편지를 받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굳이 바빴다거나, 그래서 겨를이 없었거나 하는 핑계를 댈 생각은 없다.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그저 ‘답장을 쓸 수 없는 마음만이 가득 차 있는 시간을 보냈다.’ 라는 말 뿐이다.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질량을 품은 듯 무거운 펜은 편지지 위에 단 한 획조차 써 내리지 못하게 했다. 획이 더해질수록 펜의 무게보다 더한 중력이 내 마음을 짓누를까 두려웠던 것 같다. 겨우 막아놓은 댐이 무너지듯, 한 획 한 획에 굉음을 내며 무너질 슬픔이 두려웠다. 한번 터진 슬픔은 도저히 통제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1시간 10분’ 대충 예상한 시간이다. 환승할 필요도 없고 날씨도 좋아 선택한 버스. 하지만 그 긴 시간 때문에 가져온 책도, 창밖도 보지 않는다. 자리가 생겨 앉자마자 유튜브를 꺼냈고 자연스럽게 알고리즘을 따라간다. 하긴, 차 안에서 책을 보다 어지러워 멀미가 났던 경험이 있다. 책은 이따 지하철을 타며 보기로 했다. 창밖, 처음 보는 비슷한 건물들의 연속일 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유익한 영상시청 시간을 만들기로 한다. 그러나 결국 이미 봤던 영상들에까지 손을 뻗는다. 2년 전에 개봉한 영화 의 하이라이트 액션 영상까지 클릭하게 되었다. 액션을 하는 주인공의 배경 속 조연들 몸짓까지 세세하게 신경을 썼는지, 힘을 숨기고 있던 주인공들의 모습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장르적으로 표현했는지를 평가할 생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