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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야

그게 나잖아

우리도 씁니다 2021. 5. 25.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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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카페 앞에서 해원이 손에 든 헌 책을 살펴보고 있다. 자신이 과거에 산 책인지 아닌지 생각 중이다. 옆에서 그녀의 엄마가 말한다.

 “엄마가 하나 사줄게.”

 “됐어요. 잘못하면 집에 책이 두 권 되잖아요.”

 카페에서 나온 한 남자가 그 모습을 보더니 말을 건다.

 “그 책들, 돈 주고 싶은 만큼만 주시면 되는데·······.”

 이어지는 어색한 대화. 그리고 남자가 다시 한 번 말한다.

 “책들, 진짜 돈 주고 싶은 만큼만 주시면 돼요.”

 그러자 해원이 말한다.

 “그러면, 내가 너무 드러나잖아요.”

 그 말을 들은 남자가 멋쩍은 듯 웃는다.

 

재밌는 대사였다.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말을 직접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돈이 특히 그렇다고 생각했다. ‘주고 싶은 만큼’, ‘줘야 할 것 같은 만큼’, 이것이 기준이 되면 어쩔 수 없이 고민에 빠진다. 게다가 물건이 책과 같은 창작물이라면 아무리 중고품이어도 더욱 최소한의 금액을 생각해야 한다. ‘지금 떠오르는 가격을 말하면 상대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래서 해원이 책을 사지 않고 떠났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졌다. 그녀가 생각한 ‘주고 싶은 만큼’의 가격이 얼마였기에 그런 대답을 하고 떠났을까. 원했던 가격이 너무 낮아서이지 않을까. 생각해보니 누군가 ‘내가 너무 드러나서’라고 쉽게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머릿속에 맴도는 그 가격이 너무 적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내가 책을 제자리에 두고 떠나는 해원의 뒷모습을 직접 본다면 이렇게 생각했을 것 같다. ‘도대체 얼마를 생각했길래?’

 

안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 싶지만, 나 역시 진짜 ‘나’를 드러내기 싫어 대답을 유보한 적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착각, 상대가 나를 함부로 판단하지 못했을 거야. 그러나 책을 사지 않고 떠난 해원처럼, 오히려 누군가로 하여금 나에 대해 추측을 부추기지 않았을까. 또는 오히려 그들은 나에 대해 더 정확한 판단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나를 드러내기 싫은 사람’, 또는 ‘너무 계산적인 사람’

 

결국 나를 드러내지 않는 방법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대화를 한다는 전제하에 그렇다. 해원이 스스로는 드러내지 않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책이 집에 있을지도 모르니 가격에 상관없이 구매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 추측, ‘매사에 신중한 사람.’ 그렇다면 대화를 하지 않고 바로 책을 두고 떠난다면? 조금 무례해 보일지는 몰라도, 나에 대한 추측을 최소화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해원을 연기한 배우처럼 다른 사람을 연기하지 않는 이상, 대화는 어떻게든 나를 드러낸다. 문득 나를 쉽게 알아본 얼굴들이 생각났다. ‘대화만 했을 뿐’인 게 아니라, ‘대화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나를 드러내는 것이 싫다면서도 대화를 끊지 않는 누군가의 모습은, 되려 나를 드러내고 싶은 마음을 알아달라는 모습이 아닐까 싶어졌다.

 

책상에 엎드려 잠든 해원의 모습이 보인다. 꿈속을 유영하는 듯한 몇 장면이 이어지고 해원은 다시 그 카페 앞에 서서 책을 집는다. 그리고 누군가 나와서 똑같이 그녀에게 말한다. “주고 싶은 만큼만 주시면 돼요.” 그녀는 이전과 똑같이 답한다. “그러면 내가 너무 드러나잖아요.” 그러나 대화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남자가 대뜸 책을 사주겠다 말한다. 괜찮다고 말하는 해원, 그러나 결국 책을 선물 받는다.

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혹시 그녀는 돈을 내고 싶지 않았던 걸까.

 

 

 

 

by. 환야

 

 

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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