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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씁니다
1. 변호사가 담당한 남자는 의도적으로 피해자를 살해하고 유기한 혐의를 갖고 있다. 변호사와 검사, 그리고 판사는 재판 전에 모여 진행과 결론을 의논한다. 검사와 판사는 최고 형벌로 결론짓기를 원한다. 재판 막바지에 갑자기 자신의 혐의를 전면 부인하는 등 피의자의 비일관적인 행동으로 인해 변호사도 이제는 그것이 불가피한 것을 안다. 게다가 ‘법조계’라는 한 배를 탔기에 더 이상 밀어붙이는 것도 자신에게 좋지 않다. 이젠 감정을 담아 피의자를 위로하고, 스스로 최선을 다했다고 되뇌이는 게 최선이다. 재판이 끝났다. 변호사는 피의자의 자백을 상기한다. 앞에 놓인 시체를 보며, 그는 뺨에 묻은 피를 손등으로 닦았다고 한다. 변호사가 법정을 나온다. 해가 지고 있다. 붉은 노을빛이 그의 뺨에 닿는다. 그는 뭔가..
홍상수 감독의 최신작을 보았다. 라는 제목의 영화인데, 늘 그래왔듯, 극적인 사건이 없을뿐더러 형식적인 변화도 두드러지지 않았다. (2011)이나 (2014)의 경우 형식적인 변화가 명확했고, (2010)는 네 편의 단편작들을 모아놓은 것이기에 그것만으로도 큰 변화이자 일종의 사건이었다. 을 기점으로 그의 영화는 점점 소설보다는 시적인 형식을 띠기 시작했고, 이번에도 그러한 형식적인 부분이 존재했지만, 그게 다인 것처럼 보인다. 물론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서는 여전히(작품성적인 측면이 아닌 존재감의 측면에서) 독보적인 형태였다. 그러나 2011년 이후 늘 그런 형식적인 모습에서만 흥미로운 것은 아니었다. (2017)는 누가 보아도 각본가이자 감독 자신의 상황임을 보여주는 내용을, 노골적으로 대사까지 사용해..
1. 의무경찰로 복무하던 시절, 소속된 경찰서의 관할구역을 방범·순찰하는 게 담당 임무 중 하나였다. 서너 명이 한 조를 이뤄 그 날 해당하는 일대를 조의 수만큼 나눠 순찰한다. 배정받는 곳들의 명칭은 ~초교(初校), ~사거리, ~역, ~소방서, ~파출소 등이다. 그런데 그중 눈에 띄는 곳이 하나 있었고, ‘~마트’가 바로 그것이었다.(사실 마트라기보다는 슈퍼에 더 가까웠지만.) 2. 내가 지금 사는 곳을 관할하는 경찰서 역시 존재하고, (지금은 해체됐지만)그곳에 소속된 의무경찰들이 타고 이동하는 경찰버스를 전역 후 가끔 볼 수 있었다. 집 근처에서 방범·순찰을 하는 그들의 모습을 직접 마주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어느 날 한 번은 우리와 가까이 사는 이모네 집 근처를 의무경찰들이 순찰하면 어떨까 하고 ..
어느 날 아침 못 보던 2인용 유아 자전거 하나가 아파트 복도 한 켠을 차지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며칠 전 밖에서 들리는 이사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깼던 것 같다. 자전거는 이삿짐들 중 하나일 터였다. 엘리베이터 근처에 놓인 그 자전거는 나를 포함한 같은 층 주민들의 통행을 방해할 만큼 크거나 존재감을 표출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복도라는 공용 공간에 개인의 물건을 둔다는 것이 그리 바람직해 보지지 않는 것이 사실이었다. 물론 피치 못 할 사정이 있을 수도 있고, 말한 것처럼 통행에 방해가 되지 않기에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는 게 더 나을 수 있다.(가연성 물질이 아니기에 법적인 접근이 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인정한다. 그러나 도난방지도 안 한 채로 자전거를 세워 둔다는 점이 적잖이 신경 쓰였다..
장마였다. 올해 장마는 특히 길었다고 한다. 게다가 기억나는 태풍의 이름만 세 개 정도이니 단순히 긴 장마가 아니었다. 그리고 하필 그 시기에 촬영이 있었다. 덕분에 체감상 그 기간은 더욱 대단하게 느껴졌다. 8월이 시작되면 세찬 비까지 내리지는 않을 거라 감히 예상했고, 주간 일기 예보에 뜬 먹구름들은 예측하기 힘든 시기에 대한 기상청의 귀찮음을 대변한다고 여겼다. 그리고 촬영 일주일 전, 비가 계속 올 거라는 일기 예보를 보고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지금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그때 되면 안 오겠지.” 테스트 촬영을 위해 모인 스태프들은 서로 이렇게 위로했다. 아니, 나를 위로했다. 나도 웃으며 맞장구를 쳤지만, 첫 연출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연출이었고, 졸업 영화라는 타이틀은 ‘될 대로 되..
우리가 어떤 것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변화’라는 현상에서 기인한다. 한 철학자의 말처럼 ‘생각’이라는 ‘감각’이 ‘존재’를 보장하듯, 우리가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감각 기관을 통해 변화를 인지해야 한다. 그리고 그 변화가 클수록, 다시 말해 감각이 영향을 받을수록 존재를 더 확실히 인식하게 된다. 그런데 이때 변화를 위해 필수적인 것이 ‘시간’과 ‘공간’이다. 물리적으로 접근했을 때 이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지만, 그런 이론적인 측면을 제외하고도, 시간과 공간이 보장되지 않으면 ‘변화’라는 것을 필두로 ‘존재’에 대한 담론을 이어가기 힘들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필수적인 ‘시간’과 ‘공간’은 존재 인식을 위해 필요한 ‘수단’이 된다. 자극을 넘어서는 ..
시험 기간이었다. 대부분 시험이 리포트로 대체되었고, 때문에 좀 더 다양한 측면에서 글을 진행해봐야겠다는 이유로 핸드폰을 켜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살피고 있었다. 아쉽지만 유튜브에는 A+를 받을만한 신선한 접근법이 나와 있지 않았다. 물론 검색어가 잘못되었을지도 모르고, 다양한 분야로 안내하던 알고리즘은 글의 수준을 높여줄 만한 영상으로 안내하지 않았다. 영상을 찾을 수 없어 다음으로는 이런저런 커뮤니티의 글들을 살폈다. 유머가 가미될수록 글의 흥미도가 높아질 것이라는 생각에 선택한 것은 ‘유머 게시판’이었고, 재미있는 글 하나를 발견했다. 한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캡처해 온 듯한 글의 제목은 ‘20대 후반에 깨달은 것’이었고, 내용은 대인관계, 체력관리 등을 포함한 다섯 가지로 된 조언 또는 일종의 ..
8시에 과외가 있었다. 장소는 ‘스터디 카페’ 안에 있는 ‘스터디 룸’이고, 정각이었지만 학생은 도착 전이었다. 늘 5분 이상 기다리는 게 일상이었기에, 화이트보드 위치를 조정하고 앉아서 내일 일정표를 점검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학생일 터였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네’라고 답했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사람은 스터디 카페의 주인이었다. 뭔가 작은 문제가 생긴 것을 직감했고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물음을 대신했다. ‘유감이다’라는 단어가 도드라진 표정과 함께 그는 예약한 시간이 변경된 것 같다고 말했다. 직감이 맞았다. 동시에 전날부터 시작된 방역 2단계에 포함된 사업장 수칙이 머리에 스쳤다. 학생 쪽에서 예약을 취소했거나 다른 날로 예약 시간을 변경한 것이었다. 생각보다 ..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수업시간이 지하철 왕복 시간과 거의 같았기에, 그 무기력함을 달랠 방법을 찾고 있었다. 지하철 출구를 빠져나오자마자 보이는 제과점이 눈에 들어왔고, 혹시 질리지 않을까 하는 염려로 최소한의 구매 기간을 정해둔 빵 종류 하나가 생각나 구매하기로 했다.(프랜차이즈 제과점이고, 어떤 빵인지는 비밀이다.) 대부분의 제과점이 그렇듯, 그곳도 전날 남은 빵들을 할인(20%)해서 판매한다. 그리고 그 할인된 녀석들을 모아놓는 선반은 어느 제과점이든 간에 매장 입구에 자리하고 있다. 이 매장은 다행히(?) 선반을 매장 밖이 아닌 내부에 위치시켜 놓았지만, 입구 바로 옆이었기에 창을 통해 지나가는 외부 사람들과 아이컨택을 하며 고를 수 있는, 다소 부담스러운 위치이긴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대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