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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야

비 오는 날이면 촬영장에 가야 하나[12월 : 비에 대하여]

우리도 씁니다 2021. 1. 1.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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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였다. 올해 장마는 특히 길었다고 한다. 게다가 기억나는 태풍의 이름만 세 개 정도이니 단순히 긴 장마가 아니었다. 그리고 하필 그 시기에 촬영이 있었다. 덕분에 체감상 그 기간은 더욱 대단하게 느껴졌다. 8월이 시작되면 세찬 비까지 내리지는 않을 거라 감히 예상했고, 주간 일기 예보에 뜬 먹구름들은 예측하기 힘든 시기에 대한 기상청의 귀찮음을 대변한다고 여겼다. 그리고 촬영 일주일 전, 비가 계속 올 거라는 일기 예보를 보고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지금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그때 되면 안 오겠지.” 테스트 촬영을 위해 모인 스태프들은 서로 이렇게 위로했다. 아니, 나를 위로했다. 나도 웃으며 맞장구를 쳤지만, 첫 연출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연출이었고, 졸업 영화라는 타이틀은 될 대로 되라지와 같은 표면적인 여유도 허락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3일간의 촬영 기간 모두 비가 왔고, 대사도 바꿨다. 그리고 다짐했었다. “8월에 다시 영화 찍나 봐라. 찍더라도 맑은 버전과 흐린 버전, 둘 다 만들고 만다.” 그렇게 고생을 해 놓고, 아니, 그렇게 스태프들 고생 시켜놓고, 또 한 번 단편 영화를 찍게 될 거라 생각하는 것도 웃기지만, 아무튼 누굴 놀리듯 내리던 비를 보며 외양간을 고치던 내 모습은 지금 생각해봐도 상당히 안타깝다.

 

촬영 2일 차, 전날 기상청은 태풍을 예고했다. 확신에 찬 보도였다. 첫날부터 고생은 고생대로 한 상태라 새벽 4시를 가리키는 시계를 보며 반 포기 상태로 촬영장에서 잠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니 몇 시간 뒤, 해가 떠 있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전부 실내 촬영이었지만, 노을 지는 장면이 필요했기에 자연광이 절실했다. 그리고 천천히 아침을 먹는 촬영 조명부 스태프들을 무의식적으로 다리를 떨며 지켜보았다. , 정말 연출을 맡으면 배가 고프지 않다. 나는 밥도 안 먹고 계속 다리를 떨고 있었다. 다행히 그날 노을 지는 장면을 촬영할 수 있었다. 비는 정오가 지나서 오기 시작했다. 덕분에 다음 날도 비가 오지 않을 거라는 희망을 가졌지만, 결국 대사는 바뀌었다. 주인공의 대사 앞에 비가 오는데,”가 붙었고, 편집을 하며 자괴감에 빠진 내가 떠오르는 것을 억누르며 마지막 촬영을 마쳤다. 참고로 2주 뒤에 추가 촬영이 있었고, 그날도 아침부터 비가 오기 시작해, 누군가 나를 위한 개꿀잼 몰카를 한다고 확신했다. 뭐 신기하게도 촬영을 시간이 되자 비가 멈췄고, 그렇게 모든 촬영이 다 끝났다.

 

그리고 편집을 시작했다. 며칠 후 대사까지 바꿔야 했던 그 장면을 편집할 순서가 되었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비와 어우러지는 장면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힘을 갖고 있었다.(본인의 작품을 두고 이런 말을 하는 게 좀 우습지만, 정말 놀랐다.) 또한 밝은 날만을 생각한 내용이라 중간에 들어간 그 흐린 날의 분위기는 의도한 바를 더 효과적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홍상수 감독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2015)의 눈 덮인 길가는 예상치 못한 풍경이었고, 이 때문에 당일 이야기를 바꿔 결말이 꽤 크게 바뀌었다. 이창동 감독의 <버닝>(2018)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예상치 못한 진눈깨비의 출현이 단순한 결말에 입체적인 효과를 가져다 주었다. 물론 내 작품을 감히 그 작품들과 비교하자는 것이 아니다. 가끔 감독들이 밝히는 촬영 일화들을 듣고 거짓이라 생각한 적이 많다. 그러나 직접 그런 의도치 않은 순간들을 겪고 나니, 많은 스태프들의 노동이 들어가 오차를 최소화시켜야 할 창작과정에서 생기는, 피치 못 할 문제들이 만들어내는 영화적인 장면들은 흥미로움을 넘어선 신비로움이었고, 창작의 쾌감을 온몸으로 마주한 느낌이었다. 덕분에 8월에 내리던 그 , 나에게 고통인 동시에 창작의 욕망을 발현시키는 요소가 된 것 같다.

 

하지만 자연광이 필요한 작품을 찍는 누군가에게, 아직 비 오는 8월을 촬영날짜로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by. 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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