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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야

제가 보이십니까

우리도 씁니다 2020. 11. 23.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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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수업시간이 지하철 왕복 시간과 거의 같았기에, 그 무기력함을 달랠 방법을 찾고 있었다. 지하철 출구를 빠져나오자마자 보이는 제과점이 눈에 들어왔고, 혹시 질리지 않을까 하는 염려로 최소한의 구매 기간을 정해둔 빵 종류 하나가 생각나 구매하기로 했다.(프랜차이즈 제과점이고, 어떤 빵인지는 비밀이다.) 대부분의 제과점이 그렇듯, 그곳도 전날 남은 빵들을 할인(20%)해서 판매한다. 그리고 그 할인된 녀석들을 모아놓는 선반은 어느 제과점이든 간에 매장 입구에 자리하고 있다. 이 매장은 다행히(?) 선반을 매장 밖이 아닌 내부에 위치시켜 놓았지만, 입구 바로 옆이었기에 창을 통해 지나가는 외부 사람들과 아이컨택을 하며 고를 수 있는, 다소 부담스러운 위치이긴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대부분 갈 때마다 그 자리에 그 빵이 올라와 있다. 다시 말해 나는 늘 부담을 안고 할인 구역에서 창밖을 마주하며 빵을 고른다.

 

누군가에게는 그게 왜 부담이라는 단어와 공존하는 순간인지 의아해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는 공감할 것이라 확신하고, 더 심각한 누군가는 공감을 넘어서 아예 할인을 받지 않는 것을 선택하리라. ‘아니, 같은 빵이고 그냥 할인된 것들을 고르는 건데 뭐가 그렇게 문제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일 나온 같은 빵이 제자리에 우두커니 존재하니, 할인 선반 위의 빵을 고르는 것은 할인이라는 단어에 큰 매력을 느낀 나머지 빵의 신선도는 안중에도 없는 소비자라는 낙인이 찍힐 것만 같은 무의식이 생기며, 그게 바로 그 부담 중 하나이다. ‘그중 하나라면 다른 이유는 무엇인지 물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유는 하나가 아니다. 그러나 더 이상 묻지 말아 달라.(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분명 있다. 당신이 아닐 뿐이다.)

 

그날도 할인 구역에서 생각해 둔 빵을 재빠르게 집었다. 그리고 이제 비할인 품목을 고를 차례였다. 할인 제품만을 골라 계산대로 가는 것 역시 앞서 말한 일종의 눈먼 소비자로 보인다는 생각에, 적어도 당일 만든 빵을 하나 이상은 골라야 한다며 스스로 정해둔 규칙을 지켜야 했다. 그렇게 수십 초 동안 어떤 신선한 빵을 골라야 할지 고민하던 중, 마스크를 낀 점원의 모습이 시선에 들어왔다. 마스크에 가려 눈밖에 보이지 않는 모습, 아는 사람이라도 바로 알아보기 힘든 모습이다. 그리고 나 역시 착용했기에 똑같은 익명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할인 구역으로 발길을 옮겼다.

 

결국 자신의 익명성이 보장될 수 없을 것이라는 불안함이 그 부담을 가져온 것이었다. ‘눈먼 소비자가 되는 것은 두렵다. 그러나 내가 누구라고 할인된 제품을 고르는 모습을 보고 손가락질하겠는가. 게다가 마스크까지 했으며, 굳이 하루 지난 빵을 고르는 그 너머의 얼굴이 궁금해서 쫓아오는 사람이 있을 리는 더욱 없었다. 싱거운 결론이라 말해도 좋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그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는 듯한 불안함을 느끼는 이들의 걱정을 덜어줄 수 있는 하나의 정보를 공유하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다시 말하지만, 분명 공감하는 이들이 있다.) 그래서 빵은 어떻게 됐냐고? 할인 구역에서 빵을 두 개 더 골랐다. 새삼 무언가를 깨닫는 변화의 순간은 잠재된 소비욕을 촉진시켰다. 그리고 그 충동적인 소비는 역시 후회를 남기지 않았다.

 

언제 마음 놓고 벗을지 모를 이 불편한 마스크는 누군가에겐 단순히 질병에 대한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예방을 위한 장치일 것이다. 그러나 나와 같은 이들에게는 익명성을 보장하며 불안함을 조금이라도 줄여주는 장치가 될 수도 있다. 물론 마스크를 오랜 시간 끼고 싶다는 말은 아니다. 마스크를 벗어도 될 시기가 찾아왔을 때, 다시 빵집을 찾은 내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기대하고 있다. 단 한 명이라도 이러한 변화와 그러한 기대를 마주했다면, 이 글은 자신의 역할은 충분히 해낸 것이다.

 

 

 

 

by. 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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