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씁니다
오늘도 판다 본문
어느 날 아침 못 보던 2인용 유아 자전거 하나가 아파트 복도 한 켠을 차지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며칠 전 밖에서 들리는 이사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깼던 것 같다. 자전거는 이삿짐들 중 하나일 터였다. 엘리베이터 근처에 놓인 그 자전거는 나를 포함한 같은 층 주민들의 통행을 방해할 만큼 크거나 존재감을 표출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복도라는 공용 공간에 개인의 물건을 둔다는 것이 그리 바람직해 보지지 않는 것이 사실이었다. 물론 피치 못 할 사정이 있을 수도 있고, 말한 것처럼 통행에 방해가 되지 않기에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는 게 더 나을 수 있다.(가연성 물질이 아니기에 법적인 접근이 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인정한다. 그러나 도난방지도 안 한 채로 자전거를 세워 둔다는 점이 적잖이 신경 쓰였다.
어떤 거주 공간을 거쳐 온 세대인지 모르지만, 이웃들의 공용 공간에 어떠한 도난 장치도 해 놓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그 정도(?)의 개인 물건은 복도에 두어도 상관 없다는 가치관을 가진 듯했다.(CCTV에 대한 믿음과는 다른 것이리라.) 이와 함께 분리수거를 대충 하는 등의 책임감 없는 행동들이 상상으로 이어졌다. 얼굴도 본 적 없는 누군가에 대한 서사를 써 내려가며, 그 자전거의 주인인 두 꼬마 아이들이 나중에 커 본인들도 모르게 이기적인 어른으로 자랄 것만 같았다.
자전거를 처음 마주한 지 약 일주일 정도 지났을까. 오전에 집을 나서 엘리베이터 앞으로 향했고, 드디어 그날 자전거의 주인들을 마주했다. 아기 판다들이었다. 날이 추워 귀가 달린 판다 털옷에 모자까지 쓰고 있어 (아쉽지만)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자전거에 오른 두 녀석은 그것에 달린 안전 벨트를 차기 위해 끙끙대고 있었고, 옆에서는 할머니로 보이는 분이 아이들의 가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 놓고 아이들의 움직임을 보며, 얼른 출발 준비를 끝내고 함께 엘리베이터에 오르길 바랐지만 결국 그 어설픈 손짓은 문이 열리고 닫히기 전까지도 안전 벨트를 마무리하지 못했다. 아우성치는 내적 아쉬움을 숨기며 1층으로 내려갔다. 왠지 기분 좋은 아침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연히 마주한 상황이나 물건을 보고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지만, 눈길을 사로잡는 게 있다면 그게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간에 우리로 하여금 어떤 서사를 작동시킨다. 그리고 그 서사들은 자연스럽게 내 경험에서 비롯된다. 앞서 말한 무책임한 어른의 서사는 분명 그런 이웃들의 모습을 직간접적으로 보아왔기 때문일 텐데, 자전거의 주인들을 마주한 그 날 ‘아파트 복도에 있는 유아용 자전거’라는 촉발제는 이제 동물 옷을 입은 아이들의 서사로 바뀌었다. 물론 이건 개인적인 변화일뿐이고, 부정적으로 신경 쓰일 수 있는 서사들 중 하나만 바뀐 것일 뿐이다. 그래도 이것만큼은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냐’고 말하고 싶다.
여전히 자전거는 그대로 복도에 주차되어 있다. 가끔 자전거가 없을 때는 좀 더 빨리 나왔으면 기분 좋은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마저 생겼다. 그런데 만약 그 자전거가 초등학생 고학년 정도의 아이가 타는 자전거로 바뀐다면······,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일이 생각나버려 그만 그 서사는 꺼내지 않기로 했다.
by. 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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