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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씁니다
♬OST: 김광민 - 작은 배 1. “나 왜 사랑해?” 전기장판을 틀면서 내가 물었다. “음...널 사랑하는데 이유가 어딨어.” 그녀가 대답했다. 이번엔 그녀가 질문했다. “넌 날 왜 사랑하는데? ” 2. 누군가 ‘자신을 왜 사랑하냐’고 물을 때, 대부분은 잠깐 당황한다. 당황한 사람은 청문회의 어벙한 장관 후보자처럼 어눌하게 뜸을 들이고, 물었던 사람의 눈동자는 어서 말해 보라며 무언(無言). 답할 사람은 클리셰(Cliché)를 사용할지, 독특한 답을 할지, 거짓의 성벽으로 사랑의 땅을 보호할지, 지금 생각한 답이 뒷감당을 할 수 있을지를 계산하고, 의문만 키우는 신중한 침묵이 너무 길지 않을까 걱정한다. 침묵은 배신이니까. 3. 순간 수 많은 선택지들이 눈 앞에 보인다. “인간성이 참 마음에 들어.”..
1. 를 시작한 지 다섯 달. 매주 멤버에게 글 피드백을 받는다. “이건 무슨 뜻이야?”, “이 표현 억지야”, “이렇게 고치는 건 어떨까?” 피드백을 받을 때마다 혼자 볼 때 보이지 않았던 어처구니없는 문장이 보인다. 어젯밤에 속으로 외쳤던 ‘완벽해’라는 말은 허무하게 폐기처분된다. 이해가 가지 않은 적도 있었다. ‘왜 너는 이해를 못 하지?’ 고집도 있었다. ‘너를 위해 내 말을 포기해야 하나? 하지만 그런 똥고집만 부릴 거면 일기나 쓰는 게 낫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2.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와 「개발자의 글쓰기」를 읽었다. 두 책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나는 글쓰기의 본질은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글은 상대방과 소통하고 교감하도록 만들어져야 하는 ‘도구’라는 것. 다시 말해, 글은 다른..
우씁니다 페이지에 글을 연재하기 시작한지 네 달 정도 흘렀다. 매주 하나씩 글을 쓰는 데에도 조금은 익숙해졌다. 하지만 익숙해진다고 글을 쓸 때 들어가는 시간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어떤 때는 세 시간 만에 써 버리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며칠을 공들여 쓰기도 한다. 레베카 솔닛은 맨스플레인에 대한 에세이 를 쓸 때 순식간에 썼다고 한다. 는 자신을 가르치려 드는 남성에 대한 일화로 글을 시작한다. 이 남성은 솔닛의 말을 중간에 끊으면서 권위적인 태도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나중에는 한 책을 꼭 읽어야 한다고 역설하는데, 그 책은 솔닛이 쓴 책이었다. 글은 곧장 강간 문화와 여성의 생존권으로 흘러간다. 여성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고 신빙성 없는 이야기라고 여기는 사회이기 때문에 데이트 폭력이나 강간이..
1. 타자 속도가 (상당히)느린 편이었다. 컴퓨터 앞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남들의 손을 보며 신기함은 느껴도 크게 부러움이나 경쟁심리가 작동하지 않았고, 입시 때까지도 컴퓨터로 하는 거라곤 몇 단어를 조합한 검색이나 게임이 다였다. 즐겼던 PC 게임 역시 각종 무기를 사용하며 팀원과의 빠른 소통이 필요한 콘텐츠보다는 자족(自足)감이면 충분한 것들이었기에 속도감 있는 타자에 대한 의존도가 높지 않았다. 그리고 대학에 입학했다. 자연과학부에 속한, 펜과 종이면 충분한 전공인 것도 그렇고, 수업 계획서 등을 찾아보며 팀플이나 리포트 위주의 과제가 거의 없는 수업들을 교양으로 채웠기에 졸업을 위한 학기들의 반이 끝날 때까지도 타자의 필요성이 크지 않다고 생각했다. 여섯 번째 학기가 시작되었다, 상대적으로 ‘리포트..
♬음악: Nils Frahm - My Friend the Forest “질문. 다른 나라로 간다면 어디서 살고 싶나요?” 그녀가 물었다. “음, 독일?”, “헐, 내가 가고 싶었던 곳이었는데.” 그녀는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1년 정도 교환학생으로 독일에 갈 생각이었다고 고백했다. 독일? 왜? 그녀는 이유를 설명했다. 독일에는 유수한 제약회사가 많다고.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가 말하길, 만약 그녀가 독일이 마음에 든다면 독일 대학에 편입하고 그곳에 살아도 된다고 말했다고. 그때 나는 아찔함을 느꼈다. 순전히 우연이었다. 우리가 만난 것 말이다. 그 사실이 아찔했다. 그녀가 독일로 갔다면? 우리는 영원히 모르는 사이가 되었겠지. 통화가 끝나고 조건(if)이 많은 알고리즘들이 머릿속을 채웠다. 그리고 우리 사이를..
소복히 엉기며 세상의 모든 색을 지운다. 파란 하늘마저 눈의 기세가 익숙한 듯 제 빛을 사위고, 세상은 온통 하얗다. 눈은 하늘과 땅, 그 사이 모든 구별을 거부한다. 온갖 경계에 달라붙어 그것을 희미하게 만든다. 길 가의 창에 비친 내 어깨를 보니, 시린 손에 꼭 쥔 우산이 무색하다. 진작에, 내 코트도 그 경계를 잃고 있다. 이게 차가운 건지, 포근한 건지. 어깨에 갈앉은 눈을 보다 코 끝이 시큰해졌다. 내일이면 녹아 모두 제 빛을 되찾더라도, 나만은 이대로 지워지면 좋겠다. 네게 가닿지 않은 나의 사랑에도 무겁게 엉겨붙어라. 대답을 듣지 못해, 독백이 된 마음들에도 재빨리 달라붙어라. 뒤엉키고 떨어져, 누구의 발이든 밟히고 깨져라. 녹아라. 멀리 흘러라. 그 와중에는 네가 아닌 눈 탓을 할 테니까...
“계산 도와드리겠습니다.” 프랜차이즈 치킨 가게 직원이 말했다. “안 도와줘도 돼요. 돈 내줄 것도 아니면서 무슨, 뭘 도와준대······.”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그녀의 대답에 직원은 ‘네?’하고 물었고, 여자는 ‘오래 걸려요?’라며 말을 돌렸다. 이재용 감독의 (2016) 속 한 장면이다. 인물의 대사처럼 ‘대신’ 또는 ‘같이’ 돈을 내줄 것도 아니기에 이 ‘계산 도와드리겠습니다.’는 그 자체로만 보면 이상한 문장처럼 보인다.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이 문장이 생겨난 데에 그리 특별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소비자에게 예의를 표현함으로써 그 가게에 대한 인식에 호감을 불러일으켜 다음 소비를 한 번이라도 더 유도하고자 한 목적이리라. 그러나 알바를 하는 직원들에게는 그것..
1. 이름도 모르는 타인을 눈에 담는다. 사람들은 그것을 ‘훔쳐본다’고 한다. 우리는 지하철에서, 학교에서, 일터에서 저 남자가 보는 영상, 저 여자가 든 핸드백, 그들의 반지, 시계, 그들이 읽는 책, 그들이 가진 핏줄과 머리카락을 훔쳐본다. 그리고 그 조각을 모아 상상의 인물을 만든다. 사람의 껍데기를 몰래 보는 것은 폭력일 수도 있다. 하지만, 껍데기로 채울 수 없는 빈 공간에 상상을 채워 넣는 건 흥미롭다. 재밌는 점은 상상이 어설픈 앎으로 변하고, 종종 어설픈 앎은 우리를 사랑에 빠지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어설프게 알기 때문에 지원하고 싶은 학과가 사랑스럽고, 어설프게 알기 때문에 연예인에게 빠지는 것처럼. 2. 완벽한 대칭인 공작나비, 한 쪽 눈이 없는 네페르티티의 흉상. 자, 우리는 어..
박은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무심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유머러스하다. 그래서 과에서 인기가 많았다. 그런데 바로 그 무심한 성격 때문에자신을 향한 호감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호감을 표현하지도 못했다. 나와 전은 옆에서 답답해하며 이런 저런 조언을 해주기도 했지만 박은 알아들은 체 하고는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번도 연애를 해보지 못 한 채로 두 학년을 다니고 박은 군대를 가버렸다. 그 뒤를 따라서 전과 내가 순서대로 입대했다. 2010년 2월 내가 셋 중에 마지막으로 제대하고 캠퍼스를 찾았을 때, 박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전의 설명에 따르면 박은 제대하고 스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그녀를 만났다. 둘은 리프트 아래에서 리프트 이용권을 검사했다. 10시간 가까이 서..
멀리서 드릴이 돌을 깨는 희미한 소리가 들린다. 산이 끈질기게 으르렁댄다. 이곳은 장례(葬禮)의 문턱이다. 관리자가 잠깐 기다리라고 말한다. “어, 그 사이 많이 자랐네.” 잠깐 동안 엄마와 이모는 입구 옆에 놓인 화분을 구경한다. 사라졌던 관리자가 들어오라 손짓한다. 우리는 복도를 걷는다. 고령화의 지린내와 베이비파우더가 섞인 눅눅한 냄새가 바닥을 기어 온다. 텔레비전 연속극 소리와 아기처럼 우는 어른의 소리가 천장을 기어간다. 우리는 병실에 들어선다. 1937년생 병명: 당뇨, 뇌경색, 신경통 참고: 연하곤란(dysphagia), 관절운동, 보청기관리, 체위변경, 통풍 이곳은 늙은이들이 누워있는 곳이다. 우리 할머니처럼. 이모와 엄마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말을 건다. 눈을 뜬 할머니더러 말해보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