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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환야

우리도 씁니다 2021. 5. 14.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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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4년이 지났다는 거지?

훈련소에서 만난 게 17년도였으니까. 우리 둘 다 두피가 보일 정도로 짧은 머리였고 동갑이었지. 훈련소 식당에서 내가 이렇게 물었어. 영화 좋아하냐고. 너는 고개를 끄덕였어. 마침 심심한데 잘 됐다 싶었고 밥을 먹으면서 영화 얘기를 했지. 얘기가 잘 통했어. 그래서 나는 너의 수준을 가늠하기 위해 평론가 ‘이동진’을 아냐고 물었지. 너는 이렇게 대답했어. “GV에서 여러 번 봤죠” 알고 보니 너는 영화에 미친 사람이었어. 암막과 밤하늘, 두 종류의 천장밖에 없었던 영화광. 그날 이후로 4주의 훈련은 영화와 인문학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채워졌어. 그때를 생각하면, 이상하게도 어떤 포만감을 느꼈던 것 같아. 아, 그리고 수학 이야기도 했었지. 진짜 흥미로운 건 너의 전공이었어. 영화를 사랑하는 동시에, 수학도 진심으로 사랑했으니까. 기억나는지 모르겠지만 너는 ‘페르마’에 대해 이야기해 줬어. 정말 재밌다는 표정으로 말이야. 그리고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꼭 읽어보라고 나에게 추천해줬지. 처음엔 농담하는 줄 알았어.

 

 

2018년,

같이 휴가를 맞춰서 전주에 갔지. 여행이 우리를 데리고 간 게 아니라 영화가 우리 멱살을 잡고 끌고 갔어. 햇볕이 한옥에 떨어지면 영화 시간에 맞추려고 잠에서 급하게 깨서 대충 밥을 먹고 뛰어가서 택시를 잡았지. 그리고 영화를 봤고 마음속에 느낌표를 찍고 영화관에서 나오면, 서로 특유의 섬세함으로 작품을 멋대로 해체하고 분석해서 작품에 상처를 입혔지. 뭐랄까, 왜 이 꽃이 아름다운지, 왜 저 꽃은 추한지 분석하기 위해 꽃잎을 하나하나를 떼어서 현미경으로 관찰하는 것 같았어. 어떤 영화는 쓰레기였어. 하지만 어떤 영화는 말로 설명할 수 없었지. 가장 중요한 질문에는 답이 없는 법이니까.

 

 

전역을 한 후에는

너의 결심이 뼈처럼 굳었고 기어코 너는 영화과로 들어가 버렸지. 너는 유망한 암호학에서 영화로, 보장된 직업훈련소에서 예술의 장으로 빨려 들어갔어. 상상만 했던 작업을 해보기로 결심한 거잖아. 영화를 공부하고, 영화를 생각하고, 영화를 보고, 영화를 쓰고, 카메라를 들고, 편집을 하고, 대본 리딩을 하는 것. 그제서야 너를 꿈꾸게 했던 ‘영화’라는 단어에 무게가 실린듯했고 너는 헌신하기 시작했지. 이때의 너는 ‘진짜’가 된듯했어.

 

사실, 나의 꿈도 영화감독이었어.

크리스토퍼 놀란처럼, 나홍진처럼 되고 싶었다고. 그들에게 깊은 경외감을 느꼈어. 하지만 어쩌다 이런 길을 걷고 있네. 부동산은 ‘불패 신화’라는 말이 있듯, 반대로 예술은 ‘필패 신화’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헌신이 두려웠는지도 모르겠어. 예술은 헌신이잖아, 안 그래? 헌신하면 영광의 길을 걸을 수 있지만 오욕의 길을 걷게 될 수도 있지.

 

예술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어떤 아이들이 떠올라.

호수 근처에서 실크처럼 부드러운 물결로 물장구치는 아이들. 예술 안 좋아하는 사람 없는 것처럼 물장구를 안 좋아하는 아이들은 없지. 그런데 다 같이 놀다가 각자의 엄마들이 들어오라고 소리쳐. 그러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가. 하지만 몇몇 아이들은 남아있어. 호수에 더 깊게 들어가고 싶은 아이들이야. 그 아이들은 어떤 빛에 의지해 호수 바닥까지 가겠다는 야심을 품었어. 몇몇은 재밌어서, 소박한 목표로, 몇몇은 운을 시험하려고, 인류의 중심이 되는 한 줌의 순간을 가지려고, 위대함이 자신의 덕목이라 생각해서, 도박꾼이 되어보려고, 몇몇은 호수 바닥이 금방 나올 것 같아서 잠수를 시도해. 하지만 부모들은 하늘이 보랏빛으로 변할 때까지 물 밖으로 나오지 않는 아이들을 우려하지. 아이들의 삶이 비틀리고 왜곡될까 봐, 아이들이 불가능한 희망 아래에서 숨을 헐떡일까 봐.

 

음, 우리의 20대가 얼마 안 남았네.

여기저기서 취업의 소식이 들리고 책임의 사슬이 보이기 시작해. 현실이라는 장르를 살아야 할 때가 온 걸까, 부드럽고 친근하게 우리의 목을 조이던 것이 강도를 높이기 시작했어. 그리고 시간은 여전히 째깍째깍 규칙적으로 흘러가. 모든 분야에 해당되는 말이겠지만, 노력이 보상을 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다수의 영화인들이 삶은 이것뿐이라고 자신하다가 자신의 운명에 실망하고 절망 속에서, 영화관이라는 심해 속에서 천천히 시들어가는 것을 알고 있잖아. 음, 예술이라, 예술은 헌신인 것 같아. 안 그래? 예술가들은 예술을 하면서 많은 것을 잃지. 하지만 예술을 하지 않으면 마음이 공허해져. 그래서 딜레마야. 나도 이 딜레마 때문에 괴롭다. 그래서 궁금해. 내 친구인 너는 이 딜레마에서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요즘은 어떤 꿈을 꾸는지 궁금해. 음, 답장 기다릴게.

 

 

 

2021.4.27. 



 

 

 

by. 얼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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