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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씁니다
혹시나 싶어서 준비해 간 휴지를 다 쓰고 마지막 남은 휴지를 다섯 번이나 접었다. 휴지를 더 많이 챙겨올걸. 휴지를 여섯 번째 접으니 콧물이 새어 나왔다. 너에게 마지막으로 ‘사랑해’를 던졌고 너는 내가 던진 ‘사랑해’를 맞고 꿀럭였다. 방에 돌아와서 사진을 지웠다. 편지를 꾸기고 선물을 꺼내고 반지를 버렸다. 쓰레기봉투가 아직 절반은 남아 있었지만 묶어서 내다 버렸다. 방 안이 쌀쌀했고 발이 시려웠다. 의자를 젖혀 천장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다 속에서 두 번이나 걸렸다. 그동안 너무 많이 ‘사랑해’를 찍어낸 탓인지 ‘사랑해’는 너를 감동시킬 수 없었다. 다 쓰지도 못하고 남아버렸다. 그렇지만 물건은 버려도 ‘사랑해’는 버릴 수가 없었다. 혹시 모르니까 그동안 ‘사랑해’를 은행에 맡겨 ..
[전진희 – 취했네 https://www.youtube.com/watch?v=bhaK9JQsn-o – 들으며 읽어주세요.] -띵 ‘다드ㄹ잘 들ㅇㅓ갓ㄴㅑ’ 양 팔을 친구들에게 붙잡혀 끌려다니다, 결국은 택시에 태워져 집에 들어간 녀석에게 제일 먼저연락이 왔다. 동행을 하나 붙여놨으니 집에는 들어가겠지 싶었는데 되려 받은 걱정에 웃음이 났다. 누구 하나 예외없이, 한겨울 동네 꼬마들 같이 얼굴이 발그레하다. 주말 저녁에 간신히 허락되는 여유에 급하게 들이부은 잔들 때문이긴 하지만, 매일을 함께 보내던 대학시절이 저물고 거진 일년 만에 만난 반가움이 벌겋게 드러난 것이기도 했다. 벌개진 얼굴들을, 거진 감긴 눈으로 바라보다 자리를 파했다. 동기들과, 선배들과 하루가 멀게 드나들던 술집이 낯설게 느껴진다는 건,..
와인을 너무 많이 넣었나 보다. 머리가 띵하고 세상이 돈다. 그릇을 물에 담가 두고 소파 위로 떨어진다. 30평 집 안에서 고요가 팽창한다. 기분 좋은 고요의 무게에 눌려 소파 깊숙이 파묻힌다. 눈을 뜨니 엄마가 현관문 앞에 서 있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면서 나를 발견했나 보다. 고개를 젖혀서 주황색 햇빛에 익은 눈으로 이마 뒤를 살핀다. 해가 지고 있다. 해는 아파트에 가려졌지만 여전히 벌떡이고 있었다. 나는 벌떡이는 해의 박동을 느낄 수 있었다. 꿈틀거리는 해와 꿈틀거리는 조직의 횡단면. 소의 간이 반으로 갈라졌다. 갈라진 조직은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는 것 같다. 송골송골 맺힌 피가 점점 커지다가 뭉쳐지고 이내 주륵 흐른다. 선홍빛 단면 위로 피가 줄기를 이루며 흘러내린다. 울퉁불퉁한 연회색 시멘트..
♬ blue room- chet baker "쳇 베이커가" 친구가 입을 연다. “뭣 땜에 인생이 꼬인 줄 알아?" 나는 고개를 젓는다. "약. 약쟁이들은 멈춰야 할 때를 모르잖아.“ 아홉시 오십분. 첫 잔은 볼 안쪽과 위 속을 지져댄다. 지금은 세상의 물기가 말라서 맑아진 겨울, 잔인하게 추웠고 하늘은 빛을 벗겨냈으며 도시는 어둠으로 목욕 중. 검은 인조 장갑을 옆에 두고 우리는 홀짝인다. 와드득 깨물어 먹고 두툼한 것을 베어서 씹는다. 술을 비우고 반항기로 가득 찬다. 친구는 음악을 안다. 존 콜트레인이, 토니 버넷이, 마일즈 데이비스가, 마이클 잭슨이, 존 메이어가 얼마나 위대한지 떠든다. 왜 양희은이 우리나라에서 보물 같은 가수인지, 왜 백예린이 위대한 가수가 될 것인지 말해준다. 나는 그가 앨범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