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전체 글 (107)
우리도 씁니다
‘참 성실하다.’ 생각이 들었다. 소일거리를 하며 시간에 쫓기지 않는 하루를 보냈던 비 내리는 날, 문득 든 생각이다. 비는 내리는 양에 맞는 소리를 낸다. 소심하게 자신에게 걸맞은 소리를 못 내지도, 위상을 드러내려는 듯한 과장을 하지도 않는다. 제 분수를 지키며, 자기의 소리를 내는 것들은 성실한 것들이다. 창을 열고 그 소리를 직접 들으며 내리는 양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귀를 기울이고 창밖에서부터 들리는 그 소리를 듣는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며 든 여러 단상들이다. 1. 비와의 대조 우리는 보통 앞으로 나아간다. ‘나 갈게!’라 말하며 굳이 방향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앞으로’를 전제한다. 혹 뒤로 가게 되면, 그런 예외 상황이 생겼을 때가 되어야, 방향을 이야기한다. 잠시 생각해..
“나도 왕년에는” 박은 숨을 후 내쉬고 말을 이었다. “비 좀 맞았어.” “비? 학점 말하는 거야?” 나는 무슨 말을 하냐는 표정으로 물었다. “야 너가 비만 많이 맞았냐? 씨도 많이 맞았지. 아주 흠씬 두들겨 맞았지.” 전이 술집의 시끌벅적한 소음에 한 몫 더하며 외쳤다. “아니! 레인 말하는 거잖아. 하늘에서 내리는 레인.” 박이 웃으며 말했다. “대학생 때는 비 맞는 거 좋아했거든. 아니 지금도 싫어하지는 않아. 오히려 맞고 싶어. 그런데 지금은 비를 맞으려면 작정을 해야 한단 말이지. 포마드스타일로 머리를 빗어 올리고 왁스를 바르면서, 가방에 512기가바이트 맥북 프로를 들고 다니면서, 천연가죽으로 만든 구두를 신으면서, 결정적으로 자동차를 타면서 비를 맞을 수 없게 되어 버렸어.” 대학 시절에 ..
장마였다. 올해 장마는 특히 길었다고 한다. 게다가 기억나는 태풍의 이름만 세 개 정도이니 단순히 긴 장마가 아니었다. 그리고 하필 그 시기에 촬영이 있었다. 덕분에 체감상 그 기간은 더욱 대단하게 느껴졌다. 8월이 시작되면 세찬 비까지 내리지는 않을 거라 감히 예상했고, 주간 일기 예보에 뜬 먹구름들은 예측하기 힘든 시기에 대한 기상청의 귀찮음을 대변한다고 여겼다. 그리고 촬영 일주일 전, 비가 계속 올 거라는 일기 예보를 보고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지금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그때 되면 안 오겠지.” 테스트 촬영을 위해 모인 스태프들은 서로 이렇게 위로했다. 아니, 나를 위로했다. 나도 웃으며 맞장구를 쳤지만, 첫 연출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연출이었고, 졸업 영화라는 타이틀은 ‘될 대로 되..
QUIZ {G와 R} 1.1 G는 왕이다. 지구 껍데기 위의 모두가 G의 식민지다. G는 위에서 아래로 우리를 짓눌러 위와 아래를 가르치고 예의를 알려준다. 꾸준하고 한결같다. 어제보다 강하거나 내일 약해지지 않는다. 왕 때문에 핸드폰을 얼굴에 떨어뜨리고, 왕 덕분에 컵에 커피를 따를 수 있으며, 왕 덕분에 둥근 지구에서 ‘자꾸 걸어나가’도 떨어지지 않고 외국인을 만날 수 있다. G, 우리의 왕, 이것을 막을 방법도, 피할 땅도 없다. 이것은 약속이다. 1.2 수평선에서 배가 사라지는 것, 개기월식, 개기일식을 보고 몇몇 영민한 사람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걸 눈치챘다. 하지만 왜 사람들이 떨어지지 않는지는 알지 못했다. 윌리엄 길버트(William Gilbert)는 자석을 떠올렸다. 달과 지구, 지구와 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