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일상 (36)
우리도 씁니다
모범생(模範生) :학업이나 품행이 본받을 만한 학생 ‘모범생’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흥미롭게도 초중고 시절처럼 ‘타에 모범이 되는 기준’이 상대적으로 명확한 때가 아닌, 대학교에 입학한 뒤 두 번이나 각기 다른 교수님으로부터 듣게 되었다. 칭찬이야 어쨌든 기분 좋은 게 사실이고, 게다가 당시 전공보다 좀 더 흥미와 열정을 가졌던 타전공 교수님들의 말씀이었기에 이렇게 글 쓰는 순간으로까지 이어진 듯하다. 처음 그 단어를 듣게 된 강의는 실습 위주의 형식이었다. 그 강의에서는 매주 실습한 내용을 각자 적어 정리한 뒤 학기 마지막 주에 제출해야 했고, 해당 과제의 서식은 학기 초에 교수님께서 미리 올려주셨다. 처음부터 끝까지 ‘팀플’이었고,(단편영화 한 편을 만드는 수업이었다.) 실습 경험이 전혀 없었..
이번에 개봉하는 영화가 있는데, GV(관객과의 대화) 진행을 그 배우가 맡는다는 거야 글쎄. 단편영화 위주로만 출연해서 영화제 아니면 보기 힘들 줄 알았지. 아, 이 영화에 출연한 건 아니고, 그 전작에 출연한 것 때문에 진행하기로 했나 봐. 그래서 이번에 가서 그림 선물하려고. 맞아, 지금 그리고 있는 게 그거야. 확실히 인지도가 높지 않아서 그런지 사진도 많지가 않아서 고르는 것도 시간이 좀 걸리더라구. 받으면 좋아하겠지? 저번에 드렸던 배우분도 책상에 잘 뒀다고 하는 거 보면 역시 괜찮은 선물이야. 역시 뭐라도 배워두면 활용할 데가 분명 있다니까. 근데 말이야, 팟캐스트 들으면서 그림 그리다가 생각난 건데, 이 선물이 괜히 희망고문이 되면 어떡하나 싶어지는 거야······. 아니, 공시 같은 것도 ..
어렸던 어느 날, 뉴스에서 우리나라 인구가 5천만이라는 말을 흘러나왔다. 틀렸다. 사회시간에 분명 4천8백만이라고 했다. 아빠에게 물었다. 금방 2백만이 늘어난 것이냐고. 아빠는 ‘둘다 5천만이야.’라고 대답했다. 그 말투는 퉁명스럽거나, 냉소적이진 않았고 따뜻한 뉘앙스에 가까웠지만, 의문이 해결될 정도의 정보를 담고있지는 않았다. 4천 8백만이 어떻게 5천과 같지. 어른들의 숫자에선 2백만 정도는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것인가. 작은 수는 아무 의미 없는 것인가. 그 당시에는 다른 감정이 없는 ‘궁금함’뿐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영화를 보다 낯선 단어에 귀가 닿았다. 타짜2에서 주인공 대길이가 일명 ‘탄’을 맞는 장면이었다. 대길이는 판에서 진 댓가로 9억9천8백40만원을 물게 되었다. 귀를 끈 단어는 ..
1. 의무경찰로 복무하던 시절, 소속된 경찰서의 관할구역을 방범·순찰하는 게 담당 임무 중 하나였다. 서너 명이 한 조를 이뤄 그 날 해당하는 일대를 조의 수만큼 나눠 순찰한다. 배정받는 곳들의 명칭은 ~초교(初校), ~사거리, ~역, ~소방서, ~파출소 등이다. 그런데 그중 눈에 띄는 곳이 하나 있었고, ‘~마트’가 바로 그것이었다.(사실 마트라기보다는 슈퍼에 더 가까웠지만.) 2. 내가 지금 사는 곳을 관할하는 경찰서 역시 존재하고, (지금은 해체됐지만)그곳에 소속된 의무경찰들이 타고 이동하는 경찰버스를 전역 후 가끔 볼 수 있었다. 집 근처에서 방범·순찰을 하는 그들의 모습을 직접 마주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어느 날 한 번은 우리와 가까이 사는 이모네 집 근처를 의무경찰들이 순찰하면 어떨까 하고 ..
어느 날 아침 못 보던 2인용 유아 자전거 하나가 아파트 복도 한 켠을 차지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며칠 전 밖에서 들리는 이사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깼던 것 같다. 자전거는 이삿짐들 중 하나일 터였다. 엘리베이터 근처에 놓인 그 자전거는 나를 포함한 같은 층 주민들의 통행을 방해할 만큼 크거나 존재감을 표출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복도라는 공용 공간에 개인의 물건을 둔다는 것이 그리 바람직해 보지지 않는 것이 사실이었다. 물론 피치 못 할 사정이 있을 수도 있고, 말한 것처럼 통행에 방해가 되지 않기에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는 게 더 나을 수 있다.(가연성 물질이 아니기에 법적인 접근이 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인정한다. 그러나 도난방지도 안 한 채로 자전거를 세워 둔다는 점이 적잖이 신경 쓰였다..
‘참 성실하다.’ 생각이 들었다. 소일거리를 하며 시간에 쫓기지 않는 하루를 보냈던 비 내리는 날, 문득 든 생각이다. 비는 내리는 양에 맞는 소리를 낸다. 소심하게 자신에게 걸맞은 소리를 못 내지도, 위상을 드러내려는 듯한 과장을 하지도 않는다. 제 분수를 지키며, 자기의 소리를 내는 것들은 성실한 것들이다. 창을 열고 그 소리를 직접 들으며 내리는 양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귀를 기울이고 창밖에서부터 들리는 그 소리를 듣는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며 든 여러 단상들이다. 1. 비와의 대조 우리는 보통 앞으로 나아간다. ‘나 갈게!’라 말하며 굳이 방향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앞으로’를 전제한다. 혹 뒤로 가게 되면, 그런 예외 상황이 생겼을 때가 되어야, 방향을 이야기한다. 잠시 생각해..
장마였다. 올해 장마는 특히 길었다고 한다. 게다가 기억나는 태풍의 이름만 세 개 정도이니 단순히 긴 장마가 아니었다. 그리고 하필 그 시기에 촬영이 있었다. 덕분에 체감상 그 기간은 더욱 대단하게 느껴졌다. 8월이 시작되면 세찬 비까지 내리지는 않을 거라 감히 예상했고, 주간 일기 예보에 뜬 먹구름들은 예측하기 힘든 시기에 대한 기상청의 귀찮음을 대변한다고 여겼다. 그리고 촬영 일주일 전, 비가 계속 올 거라는 일기 예보를 보고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지금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그때 되면 안 오겠지.” 테스트 촬영을 위해 모인 스태프들은 서로 이렇게 위로했다. 아니, 나를 위로했다. 나도 웃으며 맞장구를 쳤지만, 첫 연출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연출이었고, 졸업 영화라는 타이틀은 ‘될 대로 되..
QUIZ {G와 R} 1.1 G는 왕이다. 지구 껍데기 위의 모두가 G의 식민지다. G는 위에서 아래로 우리를 짓눌러 위와 아래를 가르치고 예의를 알려준다. 꾸준하고 한결같다. 어제보다 강하거나 내일 약해지지 않는다. 왕 때문에 핸드폰을 얼굴에 떨어뜨리고, 왕 덕분에 컵에 커피를 따를 수 있으며, 왕 덕분에 둥근 지구에서 ‘자꾸 걸어나가’도 떨어지지 않고 외국인을 만날 수 있다. G, 우리의 왕, 이것을 막을 방법도, 피할 땅도 없다. 이것은 약속이다. 1.2 수평선에서 배가 사라지는 것, 개기월식, 개기일식을 보고 몇몇 영민한 사람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걸 눈치챘다. 하지만 왜 사람들이 떨어지지 않는지는 알지 못했다. 윌리엄 길버트(William Gilbert)는 자석을 떠올렸다. 달과 지구, 지구와 태..
우리가 어떤 것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변화’라는 현상에서 기인한다. 한 철학자의 말처럼 ‘생각’이라는 ‘감각’이 ‘존재’를 보장하듯, 우리가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감각 기관을 통해 변화를 인지해야 한다. 그리고 그 변화가 클수록, 다시 말해 감각이 영향을 받을수록 존재를 더 확실히 인식하게 된다. 그런데 이때 변화를 위해 필수적인 것이 ‘시간’과 ‘공간’이다. 물리적으로 접근했을 때 이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지만, 그런 이론적인 측면을 제외하고도, 시간과 공간이 보장되지 않으면 ‘변화’라는 것을 필두로 ‘존재’에 대한 담론을 이어가기 힘들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필수적인 ‘시간’과 ‘공간’은 존재 인식을 위해 필요한 ‘수단’이 된다. 자극을 넘어서는 ..
11월이 손을 흔들며 지나가고 12월에 접어들자, 한 점의 온기 없는 바람이 겨울의 도착을 알린다. 서로를 채찍질하던 잎을 잃은 나무들은 조용히 몸을 흔들고 태양의 마지막 햇빛 웅덩이가 증발하며 도시는 어둠에 몸을 담근다. 그러자 어느새 9시. 막 퇴근한 그녀의 손을 잡고 거리를 걷는다. 아이스크림 가게 앞의 실외 배너가 쓰러져있고 도망칠 수 없는 나무처럼 가게들이 우직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가게는 없다. 녹아있던 땅과 가게는 다시 얼기 시작했다. 샅바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바이러스는 우리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다시 우리를 희롱한다. 바이러스가 경제를 휘청거리게 할 거라고 생각했지, 경제에 린치를 가할 줄은 몰랐다. 우리가 바이러스를 지배할 것이라고 생각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