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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야

모범생

우리도 씁니다 2021. 3. 1.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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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생(模範生)

:학업이나 품행이 본받을 만한 학생

 

 

모범생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흥미롭게도 초중고 시절처럼 타에 모범이 되는 기준이 상대적으로 명확한 때가 아닌, 대학교에 입학한 뒤 두 번이나 각기 다른 교수님으로부터 듣게 되었다. 칭찬이야 어쨌든 기분 좋은 게 사실이고, 게다가 당시 전공보다 좀 더 흥미와 열정을 가졌던 타전공 교수님들의 말씀이었기에 이렇게 글 쓰는 순간으로까지 이어진 듯하다.

 

처음 그 단어를 듣게 된 강의는 실습 위주의 형식이었다. 그 강의에서는 매주 실습한 내용을 각자 적어 정리한 뒤 학기 마지막 주에 제출해야 했고, 해당 과제의 서식은 학기 초에 교수님께서 미리 올려주셨다. 처음부터 끝까지 팀플이었고,(단편영화 한 편을 만드는 수업이었다.) 실습 경험이 전혀 없었던 나는 어떤 경우에서도 누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긴장감 덕분에 해당 과제를 매주 빼놓지 않고 작성할 수 있었다.(대단한 건 아니고 단순히 매주 두 줄 정도만 적으면 되는 과제였다.) 그리고 종강을 2주 정도 남겼을 때, 교수님은 10명 남짓한 학생들에게 실습일지를 언제 어디로 보내면 되는지 말씀하셨다. 그런데 의아하게도 나를 제외한 모든 학생들은 해당 과제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이에 교수님은 본인이 과제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당황하셨고, ‘과제의 존재를 알고 있던 학생이 나만은 아니겠지생각했던 나는 손을 들어 내 과제의 진행 상황을 알렸다.(생각해보니 한편으론 학생들이 일부러 모른 척을 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그 말을 하고 나서야 과제를 한 게 오직 나 하나뿐이었음을 모두 알게 되었고, 과제를 내준 것이 맞았다고 안심한 교수님은 그래도 한 과목에 저런 모범생이 한 명은 있다니까.’라고 말한 뒤 말을 이어가셨다. 맞다. 그리 특별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름의 열정과 걱정을 가지고 있던 곳에서 들은 칭찬이라는 점에서 적어도 나에게는 적잖은 가치가 있었다.

 

1년 뒤 또 다른 실습 수업을 들었다. 졸업작품을 위한 수업이었고, 방학 때 제작을 마친 뒤 편집만 남기고 있던 나는 해당 수업에서 편집본을 보여주며 의견을 듣는 것만 진행했다. 그런데 하루는 유튜브의 상태가 좋지 않았던 탓에, 링크만 가져온 학생들은 피드백이 필요한 본인의 영상을 보여줄 수 없었고, 무슨 고집인지 매번 노트북과 USB를 들고 다녔던 나는 다행히 파일도 있어 영상을 보여줄 수 있었다. 사이트에 문제가 생긴 것을 안 교수님은 나에게 와서 파일을 가져왔냐고 물었었고, 가져왔다고 답한 나에게 역시 모범생이라는 말을 나지막이 남기고 자리로 돌아가셨다. 그런데 분명 일종의 칭찬이었던 그 단어가, 그날 이상하게도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다.

 

본전공인 자연과학부라는 곳에서는 과제를 빼놓지 않고 하는 것은 기본이고, 이와 함께 눈에 띄는 성적을 보여주는 것이 앞서 언급한 단어에 상당히 부합하는 방식일 것이다. 그러나 예술이라는 영역과 교집합을 이루고 있는 또 다른 영역에선, 성적을 위해 모든 과목을 열심히 하는 것도 분명 좋은 말을 들을 만하지만 학점과 비례하지 않는 창작 행위에 포함되는, 일종의 감각이나 기술적인 부분 그리고 더 나아가 그 결과물을 보는 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수용적인 관객이 되도록 하는 것이 더 칭찬받을 만한 부분이며, 여기에서 타에 모범이 되는 기준을 규정하기는 힘들어 보인다.(게다가 성적과 창작 활동 중 후자를 선택하는 것이 그들에게 더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학과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결과까지 만들어내고 만족하는 삶을 사는 이들을 비하하고자 하는 의도는 조금도 없다. 나 역시 그것을 원동력으로 삼아 만족하는 순간이 많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날 두 번째로 들은 모범생이라는 단어로부터 시작된 회상은 그간의 행위에 있어서 준비성성실함만 있었을 뿐, 괜찮은 창착의 결과물을 제대로 보여준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고, 덕분에 처음 들었던 단어 역시 비슷한 느낌으로 해석이 되는 순간을 마주했다.

 

배부른 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찬사의 말이 어떤 영역에서는 칭찬이지만, 또 다른 영역에서는 아쉬운 평가일 수도 있다. 두 번째 칭찬을 들은 날 밤, 앞으로의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잠을 설친 것도 사실이다. 뭐 다행히, 지금은 그것 역시 시간과 집중을 통해 돌파구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렇게 글로 쓸 수 있게 된 것을 보아 또 한 번 그 단어를 듣게 되기 전까지는 괜찬을 것 같다. 다만 내가 앞으로의 칭찬의 말들을 막연히 기분 좋게 들을지 조금은 의문스럽다.

 

 

 

 

by. 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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