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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씁니다
"OO해." 내가 말했다. "뭐야?" 그녀가 당황했다. "새로 만든 단어야. ‘사랑해’보다 더 사랑한다는 뜻이야." "(웃음) 이상해." "그래?“ 사실 나 역시 ‘OO’이란 발음이 억지스럽다고 생각했다. 내가 먼저 물었나? 아마 그랬던 것 같다. 새벽의 통화에서였다. 나 말고 마지막 연애가 언제였냐는, 그런 식의 질문을 했다. 그녀는 내가 상처받을 것 같다는 말을 하며 주저했다. 그러다 혼자서만 간직하던 과거를 토해냈다. 내가 그녀에게 처음 말을 걸었을 땐 이미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나에게 이런 말을 해대겠지. 멍청한 놈. 그런 걸 왜 물어봐? 그러게 말이다. 결국 나는 가학적인 상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바로 내가 요즘 듣고 있는 '사랑해'가 그녀 입에서 음..
♬OST: 김광민 - 작은 배 1. “나 왜 사랑해?” 전기장판을 틀면서 내가 물었다. “음...널 사랑하는데 이유가 어딨어.” 그녀가 대답했다. 이번엔 그녀가 질문했다. “넌 날 왜 사랑하는데? ” 2. 누군가 ‘자신을 왜 사랑하냐’고 물을 때, 대부분은 잠깐 당황한다. 당황한 사람은 청문회의 어벙한 장관 후보자처럼 어눌하게 뜸을 들이고, 물었던 사람의 눈동자는 어서 말해 보라며 무언(無言). 답할 사람은 클리셰(Cliché)를 사용할지, 독특한 답을 할지, 거짓의 성벽으로 사랑의 땅을 보호할지, 지금 생각한 답이 뒷감당을 할 수 있을지를 계산하고, 의문만 키우는 신중한 침묵이 너무 길지 않을까 걱정한다. 침묵은 배신이니까. 3. 순간 수 많은 선택지들이 눈 앞에 보인다. “인간성이 참 마음에 들어.”..
♬방준석 - [남과 여 OST]. https://youtu.be/f2N4QH7T460 1. 계절은 우리를 질투했다. 물론, 우린 개의치 않았다. 한여름의 볕은 열기와 습함으로 맞잡은 두 손을 위협했지만, 후후 열을 식힐 지언정 그 손을 놓아야겠다는 선택지는 우리에게 없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한기가 아직은 낯선 가을, 미처 챙기지 못한 외투가 아쉬운 것은 내 감기보단 네가 느낄 추위가 걱정스럽기 때문이었다. 온 세상을 얼릴 듯 차가운 바람이 코 끝을 얼리더라도, 한참을 안고있어도 될 듯한 핑계를 주는 것 같아 겨울에겐 되려 고맙기도 했었다. 나의 계절은 너와의 기억으로 가득 차있다. 하지만, 이제 너로 가득한 내 계절들을, 그 순환인 일년을, 아니 몇 해를 모두. 단단히 묶어 네게 보낸다. 닿으면 전기라도..
♬음악: Nils Frahm - My Friend the Forest “질문. 다른 나라로 간다면 어디서 살고 싶나요?” 그녀가 물었다. “음, 독일?”, “헐, 내가 가고 싶었던 곳이었는데.” 그녀는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1년 정도 교환학생으로 독일에 갈 생각이었다고 고백했다. 독일? 왜? 그녀는 이유를 설명했다. 독일에는 유수한 제약회사가 많다고.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가 말하길, 만약 그녀가 독일이 마음에 든다면 독일 대학에 편입하고 그곳에 살아도 된다고 말했다고. 그때 나는 아찔함을 느꼈다. 순전히 우연이었다. 우리가 만난 것 말이다. 그 사실이 아찔했다. 그녀가 독일로 갔다면? 우리는 영원히 모르는 사이가 되었겠지. 통화가 끝나고 조건(if)이 많은 알고리즘들이 머릿속을 채웠다. 그리고 우리 사이를..
1. 이름도 모르는 타인을 눈에 담는다. 사람들은 그것을 ‘훔쳐본다’고 한다. 우리는 지하철에서, 학교에서, 일터에서 저 남자가 보는 영상, 저 여자가 든 핸드백, 그들의 반지, 시계, 그들이 읽는 책, 그들이 가진 핏줄과 머리카락을 훔쳐본다. 그리고 그 조각을 모아 상상의 인물을 만든다. 사람의 껍데기를 몰래 보는 것은 폭력일 수도 있다. 하지만, 껍데기로 채울 수 없는 빈 공간에 상상을 채워 넣는 건 흥미롭다. 재밌는 점은 상상이 어설픈 앎으로 변하고, 종종 어설픈 앎은 우리를 사랑에 빠지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어설프게 알기 때문에 지원하고 싶은 학과가 사랑스럽고, 어설프게 알기 때문에 연예인에게 빠지는 것처럼. 2. 완벽한 대칭인 공작나비, 한 쪽 눈이 없는 네페르티티의 흉상. 자, 우리는 어..
“‘사랑해’를 남발하면 나중에 의미가 닳을 것 같아.” 내가 말했다. 나는 어두운 방의 침대에 누워있었다. 다리를 뻗어 개어놓은 이불 위에 발을 걸치고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고 책상 위 스탠드 하나만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그녀가 대답했다. “아끼면 똥 돼.” 11월. 우리 사이를 여기까지 끌고왔던 ‘좋아해’를 ‘사랑해’가 밀어냈다. ‘사랑해’는 강했다. ‘사랑해’가 한 번 들어오자 ‘좋아해’는 역사의 반동주의자처럼 거슬렸고 눈치를 받았다. 그래서 어느 순간 ‘좋아해’는 ‘사랑하지 않아’라는 억울한 의미를 입고 짐을 싼 채 쓸쓸히 우리의 대화 밖으로 쫓겨났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정권이 끝나고 귀양을 가는 정치인처럼. 11월, 나와 그녀는 ‘사랑해’라는 말을 자주하기 시작했다. 옛 경제 교과서와 ..
애인 있는 사람을 사랑해본 적 있나요. 언젠가 한 친구는 애인이 있는 사람이라면 친구 이상의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저도 그렇습니다. 알랭 드 보통은 우리가 어떤 사람을 충분히 알기도 전에 사랑에 빠진다고 합니다(‘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맞습니다. 연애를 시작하면 언제나 썸탈 때까지는 보이지 않던 게 보이고, 봤던 것도 다르게 보입니다. 연애 초반에는 그런 면이 좋다가, 나중에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싫증이 납니다. 그런데 저와 제 친구는 그 사람에게 애인이 없는지를 확인해야 사랑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희 둘의 생각과 보통의 생각이 부딪히지는 않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얻기 전에 사랑에 빠지지만, 적어도 애인이 있는지는 알아야 사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