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환야 (34)
우리도 씁니다
‘300’, 다시 봐도 ‘300’이다. 이상하다. 분명 ‘500’이어야 맞다. 내가 지불한 것은 틀림없이 10000원이었고, 그중 5%라 하면 ‘500’이다. 그런데 ‘300’이 적혀있다. 시스템 오류이려나. 하지만 그간의 경험으로 봤을 때 의심해야 할 대상은 직감적으로 ‘나’였고, 어딘가에 숨어 있을 그 이유를 찾아보기로 했다. 나름 수년간의 노력이 담긴 ‘VIP 라운지’ 버튼을 눌렀다. 천천히 스크롤을 내리니 찾던 ‘3%’가 보였다. 찾았다. 상영 당일 전에 예매할 시 7%, 당일 예매는 3%를 적립해주는 게 그들의 입장이었다.(올해부터 바뀌었다고 한다······.) 순간 짜증이 밀려왔다. 할 게 얼마나 많은데 이제 그 많은 영화들을 최소 상영 전날부터 계획을 세워서 봐야하나. 그리고 내가 얼마나 돈..
정오의 파란 하늘이었다. 마스크를 내리고 숨을 쉬고 싶은 충동이 생길 만큼. 개인 주택이나 공장 위주의 인적이 많지 않은 길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몇몇 사람이 보여 필터 없는 호흡은 좀 더 미루기로 했다. 앞에서 자전거가 다가왔다. 저 자전거만 지나가면 잠깐 마스크를 내릴 수 있겠지. 그런데 마스크 위로 보이는, 중년 여성의 시선이 나를 향해 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을 알아봤다’는 것처럼 고개를 조금씩 인사하려는 듯 움직임. 누굴까. 일단 이 길에서 나를 알아볼 사람은 방금 마치고 온 과외 학생의 가족 말고는 거의 없다.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그와 가까워졌다. 순간적으로 비슷할 수 있는 모든 이미지와 다 비교해 보았지만, 전혀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내게 인사했다. “어, 안녕..
작은 카페 앞에서 해원이 손에 든 헌 책을 살펴보고 있다. 자신이 과거에 산 책인지 아닌지 생각 중이다. 옆에서 그녀의 엄마가 말한다. “엄마가 하나 사줄게.” “됐어요. 잘못하면 집에 책이 두 권 되잖아요.” 카페에서 나온 한 남자가 그 모습을 보더니 말을 건다. “그 책들, 돈 주고 싶은 만큼만 주시면 되는데·······.” 이어지는 어색한 대화. 그리고 남자가 다시 한 번 말한다. “책들, 진짜 돈 주고 싶은 만큼만 주시면 돼요.” 그러자 해원이 말한다. “그러면, 내가 너무 드러나잖아요.” 그 말을 들은 남자가 멋쩍은 듯 웃는다. 재밌는 대사였다.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말을 직접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돈이 특히 그렇다고 생각했다. ‘주고 싶은 만큼’, ‘줘야 할 것 같은 만큼’, 이것..
늘 그렇지만, 뭔가 될 거라는, 어떻게든 될 거라는 착각을 하는 것 같다.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말한다. “‘시험 때 되면 하겠지. 당연히 할 수밖에 없겠지. 고3 되면 잘 하고 있겠지. 내가 설마 그 학교도 못 들어가겠어?’ 이런 안일한 생각을 하면 안 돼. 불안해야 돼. 불안하지 않고 편안하다면 공부를 제대로 안 하는 걸지도 몰라.” 그럼에도 숙제를 안 해오는 아이들을 보면 답답할 때가 많다. 답이, 방법이 저렇게 있는데, 왜 그대로 안 하는 걸까. 그리고 귀가한 뒤 생각한다. ‘잠깐, 나도 그때 안 해놓고 무슨 소릴 하고 온 거야.’ 하긴 지금 이 동력은 후회에서 온 걸지도 모른다. 불안과 고통이 선명해지면 그제야 깨닫는다. 지금도 아니라고는 못 하겠다.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시간이 있을 때는 아..
“핸드폰 앞자리가 ‘010’이 아닌 사람들이 아직도 많은가 봐.” 그녀가 말했다. “그럼 ‘투지폰’을 쓴다는 거 아니야? 안 불편한가?” 내가 반응했다. “불편해도 쓰는 거면, 왜 쓰는 거 같아?” 또래 친구들보다 늦게 핸드폰을 샀던 게 생각났다. 돌이켜보면 그 전까지 내가 불편한 것은 거의 없었다. 다만 연락이 안 될 때마다 부모님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이 불편했을 뿐.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젠 ‘없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메신저들이 누군가에겐 ‘가져본 적도 없는 것’일 수도 있다. “하긴, 본인은 불편하지 않을 수도 있겠네.” “그냥 쓰던 걸 계속 쓰고 싶다는 건가.” “그렇지. 일종의 관성처럼. 그리고 핸드폰 바꾸는 것보다 번호 바꾸는 게 더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해. 특히 나이 드신 분들이 좀 더 그..
‘1시간 10분’ 대충 예상한 시간이다. 환승할 필요도 없고 날씨도 좋아 선택한 버스. 하지만 그 긴 시간 때문에 가져온 책도, 창밖도 보지 않는다. 자리가 생겨 앉자마자 유튜브를 꺼냈고 자연스럽게 알고리즘을 따라간다. 하긴, 차 안에서 책을 보다 어지러워 멀미가 났던 경험이 있다. 책은 이따 지하철을 타며 보기로 했다. 창밖, 처음 보는 비슷한 건물들의 연속일 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유익한 영상시청 시간을 만들기로 한다. 그러나 결국 이미 봤던 영상들에까지 손을 뻗는다. 2년 전에 개봉한 영화 의 하이라이트 액션 영상까지 클릭하게 되었다. 액션을 하는 주인공의 배경 속 조연들 몸짓까지 세세하게 신경을 썼는지, 힘을 숨기고 있던 주인공들의 모습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장르적으로 표현했는지를 평가할 생각에..
대화 속 ‘기회’라는 키워드가 초중고 ‘무상급식’으로 이어졌다. 전반적인 통계를 보았을 때, 시행 초기에 발생했던 우려와 달리 이젠 무상급식의 긍정적인 효과를 부정하기 힘들어진 듯하다. 그리고 그 기대 효과 중 하나는 바로 ‘아이들이 눈치를 보지 않고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정확한 인과관계를 증명하기 위한 조사가 좀 더 필요하겠지만, 최근 ‘학교 폭력도 줄었다’는 해외 연구 결과가 나올 정도이니 큰 문제가 발견되지 않는 이상 무상급식이 중단될 일은 없을 것 같다. 전면 무상급식이 시행되기 전, 선별 과정에서 신청 대상자인 아이들이 해당 신청서를 준비하고 제출하는 동안 당당하지 못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당연했으리라. 그런데 정말 주변 아이들은 그것을 놀림의 대상으로 삼고, 더 나아가 그것이 ‘학..
1. 타자 속도가 (상당히)느린 편이었다. 컴퓨터 앞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남들의 손을 보며 신기함은 느껴도 크게 부러움이나 경쟁심리가 작동하지 않았고, 입시 때까지도 컴퓨터로 하는 거라곤 몇 단어를 조합한 검색이나 게임이 다였다. 즐겼던 PC 게임 역시 각종 무기를 사용하며 팀원과의 빠른 소통이 필요한 콘텐츠보다는 자족(自足)감이면 충분한 것들이었기에 속도감 있는 타자에 대한 의존도가 높지 않았다. 그리고 대학에 입학했다. 자연과학부에 속한, 펜과 종이면 충분한 전공인 것도 그렇고, 수업 계획서 등을 찾아보며 팀플이나 리포트 위주의 과제가 거의 없는 수업들을 교양으로 채웠기에 졸업을 위한 학기들의 반이 끝날 때까지도 타자의 필요성이 크지 않다고 생각했다. 여섯 번째 학기가 시작되었다, 상대적으로 ‘리포트..
“계산 도와드리겠습니다.” 프랜차이즈 치킨 가게 직원이 말했다. “안 도와줘도 돼요. 돈 내줄 것도 아니면서 무슨, 뭘 도와준대······.”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그녀의 대답에 직원은 ‘네?’하고 물었고, 여자는 ‘오래 걸려요?’라며 말을 돌렸다. 이재용 감독의 (2016) 속 한 장면이다. 인물의 대사처럼 ‘대신’ 또는 ‘같이’ 돈을 내줄 것도 아니기에 이 ‘계산 도와드리겠습니다.’는 그 자체로만 보면 이상한 문장처럼 보인다.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이 문장이 생겨난 데에 그리 특별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소비자에게 예의를 표현함으로써 그 가게에 대한 인식에 호감을 불러일으켜 다음 소비를 한 번이라도 더 유도하고자 한 목적이리라. 그러나 알바를 하는 직원들에게는 그것..
모범생(模範生) :학업이나 품행이 본받을 만한 학생 ‘모범생’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흥미롭게도 초중고 시절처럼 ‘타에 모범이 되는 기준’이 상대적으로 명확한 때가 아닌, 대학교에 입학한 뒤 두 번이나 각기 다른 교수님으로부터 듣게 되었다. 칭찬이야 어쨌든 기분 좋은 게 사실이고, 게다가 당시 전공보다 좀 더 흥미와 열정을 가졌던 타전공 교수님들의 말씀이었기에 이렇게 글 쓰는 순간으로까지 이어진 듯하다. 처음 그 단어를 듣게 된 강의는 실습 위주의 형식이었다. 그 강의에서는 매주 실습한 내용을 각자 적어 정리한 뒤 학기 마지막 주에 제출해야 했고, 해당 과제의 서식은 학기 초에 교수님께서 미리 올려주셨다. 처음부터 끝까지 ‘팀플’이었고,(단편영화 한 편을 만드는 수업이었다.) 실습 경험이 전혀 없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