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독서 (19)
우리도 씁니다
내가 사는 안암에서 한양대학교까지 자전거를 탈 때 크게 세 가지의 길이 있다. 나는 그중에서 청계천을 따라가는 길을 가장 좋아한다. 나는 이 길을 청계천 하이웨이라고 부른다. 청계천 하이웨이는 자전거 전용도로다. 뒤에 있는 자동차가 클랙슨을 울릴까 봐 빨리 달릴 필요가 없다. 그리고 하이웨이답게 신호등이 없다. 한번 받은 신호를 계속 받으려고 조바심을 내지 않아도 된다. 초가을 아침 청계천 하이웨이는 모든 것의 경계가 뚜렷해진다. 듬성듬성 군락을 이룬 갈대는 검은색 테두리라도 있는 것처럼 그 뒤의 청계천과 구분된다. 청계천 하이웨이 위로 펼쳐진 고가도로 사이로 비치는 햇빛은 밝음과 어두움을 칼로 베어버린다. 고가도로가 구름 걷히듯 사라지면 학교에 거의 다 온 것이다. 이제 경계는 햇빛 속으로 사라진다. ..
QUIZ {무모한 ■■} 0.1 종종 지하철 영웅에 대한 기사를 본다. 언론과 기업과 정부는 그들의 ■■을 치하한다. 그러면 나오는 영웅의 겸손한 대답.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본능적으로 움직였을 뿐입니다.”, “그런 상황에선 누구나 저처럼 했을 겁니다.” 0.2 무모한 ■■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롭다. 다른 사람이 미치고 팔짝 뛰면서 망설일 때, 또 다른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써야 할 편지를 생각할 때, 또 다른 사람이 소름 끼치는 상상에게 소매를 붙잡히는 와중에, 무모한 ■■은 거창한 토론을 생략하고 사람을 뛰어들게 한다. 그 순간은 순교를 작정한 것처럼 주춤거리지도, 망설이지도, 갈등하지도 않는다. 물론 그 행동의 결과물은 장담할 수 없다. 그래서 ■■은 도박이다. 인생 최대의 ..
애인 있는 사람을 사랑해본 적 있나요. 언젠가 한 친구는 애인이 있는 사람이라면 친구 이상의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저도 그렇습니다. 알랭 드 보통은 우리가 어떤 사람을 충분히 알기도 전에 사랑에 빠진다고 합니다(‘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맞습니다. 연애를 시작하면 언제나 썸탈 때까지는 보이지 않던 게 보이고, 봤던 것도 다르게 보입니다. 연애 초반에는 그런 면이 좋다가, 나중에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싫증이 납니다. 그런데 저와 제 친구는 그 사람에게 애인이 없는지를 확인해야 사랑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희 둘의 생각과 보통의 생각이 부딪히지는 않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얻기 전에 사랑에 빠지지만, 적어도 애인이 있는지는 알아야 사랑에..
QUIZ { 계급과 ■■ } 0. 계급을 보여주는 것은 사람이 지니고 있는 물건과 말이라고 생각했다. 예컨대, 프리미엄 아파트, 눈물만 한 다이아, 웬만한 월급을 삼킨 지갑, 꾸준한 기부가 찍혀있는 통장, 싸구려 액세서리, 텅 빈 통장, 명함, 갤러리에 대한 허영, 골프채 브랜드에 대한 상식, 돈에 대한 유머감각. 이런 것들이 계급 상징의 전부인 줄 알았다. 그래서 모든 사회인을 빨가 벗기고 그들의 입을 다물게만 할 수 있다면, 신생아와 원숭이처럼 모두 똑같아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 음, 몸이 계급을 나타낼 수 있다는 생각?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는데 이제는 인정한다. 이제는 시간이 ■■에 계급의 흔적을 남긴다는 걸 안다. 망가진 ■■은 ‘경제적 취약함’이다. 그 이유는 시간이 흐르면 ■■이 하나, 둘 ..
가시 돋친 존댓말이 오갔다. 나는 팀 발표의 Q&A 시간에 자주 질문을 한다. 그날도 발표에서 미흡한 점을 지적하며, 근거로 삼은 표에 대해 질문했다. 발표자는 붉어진 얼굴로 대답했지만 부족했다. 나는 다시 질문했다. 강의실 안 80명을 침묵시킨 나의 질문을 교수가 중단시켰다. 교수는 다음 발표로 넘어가기 전 쉬는 시간을 줬다. 쉬는 시간에 방어 기제가 작동했다.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이상한 것은 내 질문을 공격으로 받아들인 발표자였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다른 일을 하다가도 화가 난 발표자의 얼굴과 목소리가 자꾸 떠올랐다. 일주일이 지나 발표가 있었던 수업이 다시 돌아왔다. 아무렇지 않은 척 강의실로 들어가서 수업 준비를 했다. 친구 한 명이 내게 다가와 오늘 자신의 발표 때는 질문하지..
Quiz {언론의 편향과 ■■} 0.1 편파(偏頗), 편중(偏重), 편중(偏重) 뉴스의 가치를 논할 때 악 (惡) 취급받는 것들이다.이것들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려는 영악하고 오만한 의도라는 이유로 쫓겨난다. 그래서 나는 치우침(편향)에 주의한다. 반면, 나는 ■■을 신성시한다. 비유하자면 어두운 계단에 있는 난간이랄까, 사실로 가는 해결책처럼 믿는다. ■■은 편향의 반대말이니까. 0.2 그런데 문제가 있다. 채널을 손에 꼽을 정도였을 때는 옳고 그른 것이 아름다울 정도로 명확해 보였는데, 지금은 각자 답을 가지고 있는 많은 언론들이 어딘가를 가리키고 ‘사실’을 다루는 각자의 솜씨로 각자의 색깔을 내고 있다. 그래서 어떻게 ■■적인 언론을 고를지, 누구의 손을 잡고 갈지 신경이 곤두선다. 누가 치우쳤지..
한양대역에서 2호선을 타고 건대 방향으로 향하면 곧장 땅 위로 올라온다. 내가 타고 있는 이 기계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지하철? 전철? 기차? 지하철이라고 하자니 땅 위로 나오는 시간이 분명 있고 전철은 구한말을 위한 단어로 남겨둬야 할 것 같다. 기차는 남한 땅 정도 되는 넓은 땅을 다녀야 하지, 수도권으로 만족할 수 없다. ‘그나마 전철이 제일 나으려나.’ 생각하던 차에 잠실을 지나며 다시 땅 밑으로 내려왔다. 지하철? 서울에 있는 대학교로 진학하며 서울에서 생활한지 벌써 5년이 지났다. 이제 스스로를 서울 사람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1년 중 대부분의 시간을 서울에서 보낸다. 고향인 포항에 내려가면 친구도 몇 안 남아 있고 할 일도 없다. 그런데 여전히 그곳에 계신 내 부모님, 우연히 경상도 ..
를 기억하시나요. 자리를 옮기며 하루에 수십 번도 넘게 일몰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행성을 떠나온 어린왕자를 기억하시나요. 어린왕자가 지구에 도착하기 전에 다섯 개의 행성에서 다섯 명의 어른들을 만났던 것도 기억하시나요? 성인이 된 지 몇 년이 지난 이제는 나는 이 다섯 명의 어른 중 어떤 어른과 닮았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아마 지리학자인 거 같아요. 지리학자는 커다란 화산은 탐구하지만 덧없는 꽃에 대해서는 탐구하지 않습니다. 직접 탐험하지 않고 탐험가에게 물어볼 뿐입니다. 어느 순간 저도 지리학자같은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아요.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단어가 화산처럼 거창해졌어요. 직접 겪은 일을 이야기하지 않고 어려워 보이는 책 속 문장을 이야기해요. 그래서 자주, 제 앞에서 동공이 풀린 채 이야..
1. 책을 좋아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성인이 된 후, 그러니까 늦은 나이에 처음으로, 그리고 제대로 책 한 권을 완독했다. 교복을 입었을 땐 뭐 했냐고? 독후감은 인터넷에서 긁어와서 완성했고 점심시간에 책을 읽는 사람이 ‘쿨’ 하지 못하다 생각했다. 그리고 당연히 책은 재미없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컴퓨터가 고장이 났다. 남은 건 핸드폰 뿐이었고 기사를 보다가 영화 평론가가 추천해 주는 책에 대한 글을 봤다. 천명관의 「고래」, 정유정의 「7년의 밤」 이었다. 뭐라더라, ‘2000년대에 나온 가장 재밌는 소설’ 이라고 했던가? 그래서 다음 날 도서관으로 갔다. 처음으로 회원카드를 만들고 앞의 두 책과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를 빌렸다. 어땠냐고? 새벽까지 다리를 덜덜 떨면서, 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