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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야

자는 게 남는 거랬나

우리도 씁니다 2020. 11. 16.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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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저녁으로 산 밥버거를 들고 다시 학교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예매해둔 영화 시간이 3시간 정도 남아 있었고, 저녁과 과제를 대충 끝낸 뒤 출발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후문 앞에서 한 잔 하러 가는 동기 둘을 마주쳤다. 그날이 마지막 상영이었던 영화였기에, 내가 들고 있던 밥버거도 안주로 하자는 제안을 두 번 거절했지만 결국 함께 근처 포차로 향했다. 당연히 술도 마셨다. 그날 그 두 사람의 목적은 기분 좋게 취하는 것뿐 아닌, 나로 하여금 영화를 취소하게 만드는 것 역시 포함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계획해 놓은 관람 예정 리스트에 구멍을 내는 것을 스스로 용납할 수 없던 시기라, 술을 먹고 보러 가라던 그들의 말을 기억하며 관람의 의지가 증발하는 것을 막았고, 먹은 만큼의 돈에 몇 천원 더 보태어 전달한 뒤 빠져나왔다. 아직도 두 사람의 눈빛이 기억에 남는다.

 

버스에서 내려 지하철로 환승 전, 취하지 않겠다며 벌컥거리며 마신 물 때문에 신속하게 화장실을 들른 뒤 지하철에 몸을 맡겼다. 이것만 마시면 보내주겠다며 웃던 그들의 모습에 오기가 생겼는지, 빠르게 소주를 입에 털어 넣은 탓, 4월이 끝나갔지만 여전히 저녁 시간에는 기온이 낮았던 탓에 지하철의 온기는 여간 따뜻한 게 아니었다. 고민했다. 지금 지하철에서 좀 자면 이따가 괜찮지 않을까, 아니면 관성을 없애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정신을 차리는 게 나을까. 이성적인 판단이 흐려졌고, 몇 분 가지 않아 밀려오던 요의 역시 한몫을 했다. 결국 중간에 한 번 더 내려 화장실을 찾았고, 아무튼 시간 맞춰 극장에 도착했다. 마치 역경을 이겨내고 목적지에 도착한 인물이 된 느낌으로 인해 긴장감이 풀려서인지, 영화가 시작한 뒤 저 멀리서 밀려오는 졸음의 무리는 굉장한 존재감을 발산했고, 여전히 마시고 있을 두 사람을 탓하며 천천히 상영관의 의자에 몸을 맡겼다. “오늘 아니면, 못 보는데······.” 결국 잤다.

 

저번 주에는 명동으로 영화를 보러 갔었다. 대만 출신 A감독의 유명한 작품이었고, 그 유명함은 영화가 담고 있는 작품성뿐 아니라 긴 러닝타임 때문이기도 했다. 237, 4시간이라는 상영시간 덕분에, 극장 역시 매일 해당 작품을 상영하는 것은 손해였다., 상영 일정이 별로 없던 이 작품 역시 그날이 마지막 상영이었다. 거기다 상영관 앞에는 2시간 후 인터미션이 있다는 푯말이 있었다. 작정하고 보러 갈 생각이었다. 안 마시던 커피를 마셨고, 그날 내 목표는 4시간을 오롯이 작품에 집중하는 것으로 설정했다. 게다가 평일이라 그런지 상영관 안에는 관객도 많지 않아, 최상의 조건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인터미션이 시간이 돼 있었다. 어떤 배경으로 이야기가 시작했는지도 알기 힘든데, 그 사이에서 느림의 미학을 찾는 것은 몇 년 동안이나 영화를 봤어도 여전히 힘들었다. 화면으로는 인터미션 시간 10분이 카운트되고 있었고, 얼마나 졸았는지, 아니 잤는지 10분 뒤 또 다시 정신 못 차릴 내 모습은 곧 두려움이 되었다. 그리고 남아있던 8분이라는 글자는 끝날 인터미션 안에 빨리 집에나 가라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바로 다시 역으로 향했다.

 

3년 전에 봤던 그 영화의 제목은 <나는 부정한다>였다. 나치와 홀로코스트를 부인해 온 데이빗이라는 인물이 역사학자인 데보라를 고소하며 일어나는, 실화에 바탕을 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너무나 당연한 승소자를 선택한 동시에 아주 특별할 것 없는 진행방식을 보였기에, 모든 관객의 졸음을 물리쳐줄 만한 긴장감을 담고 있지는 않았(다고 변명하고 싶). 그런데 후반부, 최종 판결이 있기 전 영국 판사는 데보라 측에 질문한다. ‘만약 반유대주의인 그 사람이 자신의 말을 진심으로 믿는 거라면, 그의 발언들은 데이터 조작 혐의와는 별개로 봐야겠죠?’ 데이터 조작 혐의를 받는 데이빗의 신념이 진심이라면, 이건 어떻게 봐야 하냐는 물음이다. 아무튼 데보라는 승소했다. 그러나 술과 잠에 취한 상태에서 영화 속 판사의 질문에 대해 귀가할 때까지, 아니 지금 이 글을 쓸 때까지 답할 수 없었다. 사실이 아닌 것을, 누군가 진심으로 반대로 믿고 있다면,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날 영화관을 나서며 작품과 관련된 이런저런 글을 찾아봤지만, 이 사안과 관련된 부분을 찾을 수 없었다. 술이 잠깐 깬 순간에 우연히 집중하며 본 장면이고, 전체적인 맥락과는 거리가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덕분에(혹은 때문에) 이 작품은 아직도 나에게 영향을 주는 작품이라 말하고 있다.

 

저번 주에 본() 작품은 에드워드 양감독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라는 작품이다. 채 반도 못 보았지만,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작품의 배경이 되는 당시의 대만 상황을 찾아보았고, 그 작품의 설정과 목표가 어디에 있고, 그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를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당과 갈등하던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 패한 뒤 대만으로 도피하였고, 그로 인한 독재, 백색테러, 내성인과의 갈등이 작품의 배경이었다. 이를 미학적으로 표현한 작품이 극장에서 다시 상영될 때까지 또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에 후회가 밀려왔다. 그리고 내가 왜 (잠들기 전)그 장면에서 소름이 돋았는지 알 것 같았다.

 

(자랑은 아니지만,) 잠으로 인해 작품 전체를 감상하지 않았음에도, 생각보다 많은 것을 얻은 영화들은 이것 말고도 많았다. 대부분은 2회차 관람을 했고, 다시 마주하는 장면들에서 느낄 수 있는 미학은 생각보다 더 효과적이기도 했다. <퍼스널 쇼퍼>, <컨텍트>, <, 다니엘 블레이크>, <애드 아스트라> 등과 같은 작품들이 내 기준으로 높은 별점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졸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나는 부정한다><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다시 극장에서 관람할 때, 영화적 미학을 마주하는 기쁨을 기대하고 있다.

 

졸아놓고는 말이 많았다. 어쨌건, 지루하거나 피곤해서 잔 게 맞다. 내일도 예매해둔 영화가 있는데, 오늘 자기 전에 얼마나 또 유튜브를 볼지, 그리고 내일 귀갓길에 얼마나 후회하고 변명할지 모르겠다.

 

 

 

 

by. 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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