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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야

오늘도 처음처럼

우리도 씁니다 2020. 11. 30.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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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으로 영화를 보러 갔다. 집에서 약 1시간 정도 걸리는 곳으로 영화를 보러 간 이유는 영화가 끝나고 약 2시간 정도 진행되는 평론가의 해설 때문이다. 주말이었고, 영화 시간과 비슷한 2시간 동안 해설을 진행한다고 했을 때 생각나는 평론가가 있다면 이 글이 좀 더 흥미로울 수도 있겠다.(참고로 이 평론가의 제일 길었던 해설 시간은 약 5시간으로 알고 있다.)

 

심오한 영화라기보다는 오히려 너무 단순한(것처럼 보이는) 작품이었다. 병에 걸린 소녀가 등장하고, 성실과는 거리가 먼 남자에게 첫눈에 반한 뒤, 삶이 끝나기 전까지 사랑하는, 뭐 그런 내용이다. 제목을 말하지 않는다면 이 영화를 쉽게 찾을 수 없을 것이다.(그날 나와 같은 공간에서 해설을 들은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만큼 어디서 분명 본 것 같은, 또는 언젠가 한 번은 볼 것 같은 내용이다. 영화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 이제는 자만보다는 조심성이 앞서게 되는 나 역시 해외 영화제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는 이 작품을 보며, 그 매력이 내용보다는 색감이나 촬영에 있다고 생각이 들었으니, 시간이 갈수록 따분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영화가 끝난 뒤 귀가를 고민했다. 말했듯 이날은 주말이었고 조용한 곳에서 단순한 영화에 대해 생각하며 2시간을 앉아 있는 것이 일종의 형벌로 느껴질 것 같은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문해보았다. 지금 집에 가서 2시간 동안 후회 없는 알찬 주말을 보낼 수 있겠느냐고. 재미없는 영화를 본 것에 대해 스스로 위로한다며 침대에 누워 핸드폰으로 유튜브를 포함한 어플들을 몇 번이고 순회하는 것으로만 시간을 보낼 게 뻔했다. 게다가 해설이 포함된 그 영화 티켓 값은 보통보다 비싸다. 결국 손에 든 겉옷을 다시 옆자리에 잘 정리하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곧 평론가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들려왔고, 나도 함께 박수를 쳤다.

 

결론적으로 또 한 번 내 오만함, 또는 단순함을 마주하는 순간이 되었다. 작품 안에는 표면적인 이야기 이외의, 좀 더 생각을 요구하는 연출과 장면, 그리고 그것을 고찰할만한 시간이 주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주어진 그 고민의 시간은 지루한 과정이 되어버리고, 적잖은 이들로부터 그 작품은 지루한 영화로 불리게 된다. 그렇게 많은 영화를 보면서도 영화적인미학을 알아차리는 것이(물론 영화를 단순히 즐기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왜 매번 힘든 걸까. 내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아니면 마주하고 있는 관객들의 표정이 대부분 나와 같았는지, 해설을 맡은 평론가는 잠시 해설을 멈추고 그 의문에 대해 대답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주변의 일들을 범주화한다.(단적인 예로 MBTI와 같은 것들이 있을 것이다.) 매년 개봉하는 수백 편의 영화 역시 범주화 대상이 된다. 그리고 이야기를 갖는 컨텐츠들이 범주화되는 것을 장르라고 한다. 그리고 작품들을 장르화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작품을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영화를 많이 소비할수록 우리는 영화를 장르화시켜 보게 된다. 마주한 작품에서 미학적인 부분을 찾지 않고 단순화하여 스스로 지루함에 빠지는 것이다. 나 역시 그날 내가 만든 장르 안에 잠식되어버렸다. 장르라는 병에 걸린 관객에게 내린 평론가의 처방은 다음과 같다. ‘늘 영화를 처음 보는 것처럼 대하라.’ 영화의 내용을 포함한 미학적인 부분을 발견하는 방법은 그간 알게 된 감상 방법과 함께, 영화라는 예술을 처음 마주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함부로 작품을 틀에 가두지 않고 오롯이 감상의 기쁨을 마주할 수 있다.

 

이는 다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술이라는 영역에 조금이라도 발을 걸치고 있는 것들을 우리는 자꾸 어떤 범주 안에 가둔다. 그리고 글 역시 마찬가지이다. ‘단순하고 틀에 박힌 소재는 없다. 스스로 범주를 만들어 제한을 둘뿐이다. 주변에는 다양한 소재가 존재한다. 지금 당신이 생각하는 그 소재 역시 글이 될 수 있듯이.

 

 

 

 

by. 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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