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씁니다

서울을 좋아하세요?[11월 : 서울에 대하여] 본문

환야

서울을 좋아하세요?[11월 : 서울에 대하여]

우리도 씁니다 2020. 11. 9. 11:27
728x90

 그 영화관은 광화문에 있다. ‘광화문에 있는 영화관이라 했을 때, 두세 곳이 생각나는 누군가에게, 이어지는 내용은 설명이 아닌 공감이리라. 오늘도 200명은 넘지 않았지만(이 글을 쓴 것은 9월이다.), 세 단계로 나뉜 경고에서 2.5라는 숫자가 가진 힘은, 다수가 개인의 문제를 지적하기 이전에 개인 스스로 문제를 파악하기에 충분했고, 결국 오늘도 예매를 취소했다. 게다가 영화 상영이 끝난 뒤 관객과 감독의 대화가 이어지는 자리라는 사실과 에어컨을 틀지 않아도 될 날씨에 광화문이라는 빌딩 숲 사이를 오랜만에 걸을 것이라는 기대 덕분에, 로그인부터 취소 버튼까지의 여정은 분명 꽃길이 아니었다.

 

 그 영화는 일본 후쿠오카를 배경으로 진행되는 내용이다. 매번 다양성 영화라는 목록에 들어가는 작품을 연출하는 감독의 영화인지라, 일본의 추리 소설과 같이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가 벌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갈등은 인물의 개인적인 영역에서만 떠돌 뿐, 그 지역의 시각적인 요소들을 통해 관객들에게 공간적 체험을 선사한다. 마치 여행과 같다. 그런 점에서 나는 (극장에서 보는)영화를 일종의 여행이라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영화를 보러 가는 길이 일종의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이었을지도. 아닌 게 아니라 영화나 책을 사기 위한 목적 이외에는 광화문을 갈 이유가 거의 없었기에, 서울의 그 공간은 매 순간 새로운 여행지가 되었다. 그리고 그런 서울의 체험적 공간을 우연히 영화를 통해 보게 됐을 때의 느낌은 곧 겨울로 바뀔 것에 아쉬움을 안은 가을과 같았고, 좀 더 많은 작품에서 서울의 공간과 마주하고 싶어졌다. 이번에 가지 못한 광화문 여행이 못내 아쉬운 이유이다.

 

 그런 아쉬움을 달래려 방에 앉아 서울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수많은 한국 영화들 중에 <카페느와르>라는 작품에서 시선이 멈췄다. 이 작품을 연출한 감독이 오늘 가지 못한 영화 행사의 진행을 맡은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198, 이 영화의 런닝타임이다. 학교 수업도 비대면으로 진행되며 집에 있는 시간은 자연스럽게 많아졌기에, 그동안 계획만 해놓은 영화, 드라마, 책 등을 섭렵하며 본인의 의지에 감탄할 순간을 기대했다. 그러나 주기적으로 유튜브와 같은 컨텐츠의 손을 탔고, 한 영상이 5분을 넘어가면 무조건 미리 보기가 필요할 정도로 까탈스러워진 것이 현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만히 앉아 체감할 198분은 지구의 종말도 가능한 시간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참고로 정말 정적인 작품이다.) 그럼에도 하드 어딘가에 자고 있던 파일을 찾아냈다. 이 작품을 본 게 3년 전이었고, 문득 이 작품 속 서울의 이미지와 작품을 보는 현재 내 시선의 변화에 흥미가 생겼다.(미리 말하지만 안타깝게도 3시간 동안 앉아서 끝까지 관람하지는 않았다.)

 

 <카페 느와르>의 시작은 흥미롭(거나 괴롭). 한 소녀가 자신의 얼굴만 한 햄버거를 꾸역꾸역 먹고 있다. 아니, 입안으로 집어넣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배고픔에서 시작된 행위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이 작품은 그 먹은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보여준다. 이어서 서울의 가로와 세로의 이미지들을 가진 요소들을 몇 분 동안이나 보여준다. 뭐 이렇다 할 갈등이 없다. 그렇기에 분명 이 작품을 본 다수에게 언급한 흥미로움은 지루함과 괴로움일 것이고, 갈등 없이 740초 동안이나 이어지는 몽타주들은 그들에게 스킵 버튼이나 닫기 버튼을 누르도록 만들기에 충분한 장면들이었으리라. 나 역시 첫 감상 때 1시간을 넘어갈 즈음에 화면을 끄고 잠을 청했었다.

 

 물론 이야기를 이어갈 동력이 될 갈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장면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198분이라는 시간 동안 흥미롭게 본 장면들을 전부 나열할 자신은 없다. 그렇기에 언급한 첫 장면을 가지고 얘기해 보려 한다. 이 작품의 정보를 살펴보면,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보게 되는 소녀(정인선)의 타이틀이 임신한 소녀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과거 감독과의 대화자리에서 연출을 맡은 정성일은 그 첫 장면에서 그녀가 자살 기도를 하는 것이라 설명한다. , 그제야 많은 장면들이 이해된다. 영화에서 그녀가 등장하여 보여주는 갈등의 요소들은 의도치 않은 임신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햄버거를 가지고 자살하려 하다니, 얼마나 안타까우면서도 흥미로운가.

 

 이어지는 서울의 몽타주, 역시 갈등이다. 적어도 이 작품에서는 심각한 갈등이다. 이것을 연출한, ‘평론가라는 타이틀을 가진 정성일은 모든 것을 의도하여 프레임 안에 담으려 했다. 등장하는 가로와 세로의 이미지는 영화 내내 보이는 남산타워와 청계천으로 이어지며, 서울이라는 자본의 공간을 계속해서 상기시킨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인물이 한 명씩 죽어간다. 감독은 대화 자리에서 르네상스자본주의라는 키워드를 통해, 인간이 공포를 느끼는 높이보다 건물을 더 높이 올려 그 죽음의 높이를 무감각하게 만드는 서울의 비인간성을 지적했고, 이 도시가 가진 태도와 비극을 영화를 통해 설득하려 했다. 결국 이토록 지루해 보이는 이 작품을 흥미롭게 보는 방법은 비극이 만연한 서울의 모습을 계속 느끼며 내용과 관련된 갈등을 알아가는 것이다. 그렇다, 너무 긴 런닝타임을 포함해 관객에게 상당히 많은 것을 요구하는 영화이다.

 

 그런데 이 작품을 알고 난 뒤, 이상하게 서울이라는 공간이 좋아졌다. 남산타워가 보이는 공간이 좋았고, 바로 옆에 청계천이 있는 공간들이 좋았다. 영화적인 공간, 갈등이 있는 공간, 즉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공간이었다. <남산의 부장들>, <최악의 하루>, <감시자들> 등등 흥미로운 한국 영화들이 생각나는 것을 보면 서울은 충분히 영화적인 공간이었다. 갈등이 많은 공간이 좋아서는 안 된다는 도의적인 책임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한 새로운 이야기들이 탄생하는 곳을 볼 수 있게 되는 순간, 그 공간은 나에게 또 다른 여행지가 되었다. 이곳은 이 영화의 배경이었고, 저곳은 저 영화의 배경이었다.

 

 최근에 본 단편작에서도 청계천 복원으로 시작된, 여전히 진행 중인 갈등을 담은 모습을 마주했다. 덕분에 그 작품이 나온 공간 역시 하나의 여행지가 되었다. 갈등의 장소가 여행지가 되다니, 그 갈등을 직접 겪어보지 못한 자의 무감각일지도 모른다. 혹시 그 갈등을 이해하고 공감한다면 좀 달라지려나. 그런데 그 순간을 위해서는 관련된 일들을 계속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럴수록 더 많은 이야기를 마주하며 서울을 더 흥미로운 여행지로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서울이 조금 더 좋아졌다. 다시 광화문 영화관을 검색했고, 취소할지도 모를 예매를 또 하고 싶어졌다.

 

 

 

 

by. 환야

'환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세한탄 아닙니다  (0) 2020.12.07
오늘도 처음처럼  (0) 2020.11.30
제가 보이십니까  (0) 2020.11.23
자는 게 남는 거랬나  (0) 2020.11.16
그것도 씁니다  (0) 2020.11.02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