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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하고 싶다

우리도 씁니다 2021. 5. 3.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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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어느 알코올 치료센터의 일화 하나.

어느 날 탕비실 선반에서 맥주잔이 발견됐다. 그러자 환자들은 조심스럽게 서로 어떤 맥주를 좋아했는지 이야기했다. 큰 잔에 담은 에일, 도수 높은 라거 등등. 환자들은 추억에 빠졌다. 따가운 탄산이 목을 간질이는 느낌, 에탄올이 위벽에 스르륵 흡수되는 느낌, 침울하고 나른했던 느낌. 그러자 그들 사이에서 불길한 징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0.2

중독은 뇌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그래서 환자들 사이에서 ‘치어스 Cheers’라고 장난치는 것도 위험하다. 깊게 남은 중독의 흔적은 작은 단서에도 꿈틀거리니까. 작은 단서에도 꿈틀거리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맥주잔처럼 이미지 하나가 위험하다. 내 눈에 스치는 간판, 게임, 기사 제목, 버스 옆면에 붙은 광고, 영상 중간에 끼인 광고, 왜 매번 그런 식으로 끝나는지 원망스러운 드라마 엔딩, 그리고 무엇보다 핸드폰. 정신을 놓으면 어디가 어디인지 구분도 못하고 있다.

 

0.3

1960년대에도 중독될 만한 대상은 있었다.

담배, 알코올, 마약. 구하기 어려웠고 돈을 내야 했던 물건들. 하지만 2020년대에 중독될 만한 것들은 예전과 성격이 많이 다르다. 접하기 쉽고 빠르고 편리하고 공짜이며 끝도 없는 세계다. 젠장, 장소 제한도 없다. 특히 핸드폰은 이미지들의 범벅이다. 전자사전 옆에서 나를 침 흘리게 만드는 앱, 비열할 정도로 자극적인 기사제목과 사진, 못 버티게 만드는 썸네일, 영상이 하나 끝나자 나타난 또 다른 영상, 대화방의 반가운 리액션들, 깰 것 같은 게임, 그리고 좋아요. 이미지는 또 다른 이미지의 앞잡이였다는 것이 밝혀지고, 앗 하는 순간, 10분. 앗 하는 순간, 1시간이 흐른다. 미쳤다. 인터넷 서핑? 노, 인터넷 딥 다이브(Internet deep dive)라고 불러야 한다. 알고도 당한 나는 나에게 면목이 없다.

 

0.4

나의 요즘은 이런 식이다.

집중 못 하는 게  특별한 게 아니라, 집중을 하는 순간이 특별하다. 할 일을 쌓여있는데 자율에 대한 긍지는 잃은지 오래고, 이상한 잔뇨감이 느껴져서 ‘나가기’라는 그 빌어먹을 버튼을 누르지 못한다. 나쁜 은행의 대출에 빠진 것처럼 밑도 끝도 없다. 멱살 잡힌 바보처럼 끊임없이 확인하고 끊임없이 혹한다. 깨끗한 머리로 고요하게 지냈던 적이 언제였더라? 기억이 없다. 

 

물과 공기가 무한한 공공재였던 것처럼

고요함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고요함은 이제 아주 쉽게 오염된다. 나와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고요함은 쉽게 얻을 수 없다. 우리는 헤어 나올 수 없는 홍수를 물려받았다.

 





by. 얼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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